2017년 미국은 이란에 대한 금수 조치 위반을 이유로 중국의 통신장비 업체 ZTE를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다. ZTE는 미국 부품을 7년간 수입할 수 없게 됐다. 부품을 들여오는 경로가 막히면서 ZTE의 업무는 ‘일시 정지’됐다. 2018년엔 알리바바그룹 산하의 앤트파이낸셜이 미국 최대 송금서비스 업체 머니그램 인수를 포기했다. 미국 재무부 산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가 안보상 우려를 이유로 승인을 내주지 않아서다.
<데이터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미·중 무역전쟁 이면엔 데이터 기반의 혁신 기술을 둘러싼 패권 다툼이 있다고 진단한다. 중국 푸젠성 출신인 저자는 일본 노무라종합연구소 선임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그는 책을 통해 첨단기술 기업을 중심으로 중국발 4차 산업혁명의 실체를 생생히 그려낸다.
책에 따르면 중국의 데이터 비즈니스는 ‘중국 제조 2025’를 앞세워 세계 경제 패권을 노리는 중국 정부 전략의 연장선 위에 있다. 중국 제조 2025는 2025년까지 바이오, 로봇, 통신장비, 항공 우주, 반도체 등 10개 분야를 육성해 제조업 ‘대국’에서 ‘강국’으로 가겠다는 중국의 국가 프로젝트다.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국제특허 건수가 가장 많은 기업은 4024건을 보유한 중국의 화웨이다. ZTE는 2965건으로 2위, 중국 액정표시장치(LCD)패널 생산업체인 BOE가 1818건으로 7위에 올랐다. 미국 기업으로는 인텔(2637건)이 3위, 퀄컴(2163건)이 5위를 차지했다. 일본의 미쓰비시전기(2521건)가 4위, 소니(1735건)가 9위에 이름을 올렸다. 국가별 출원 건수에서는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2위 자리를 꿰찼다. 저자는 “특허 건수만으로 혁신 역량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복제 대국’이라 불리던 중국이 ‘지식재산권의 대국’ ‘이노베이션 강국’으로 극적인 변모를 하고 있음을 데이터가 뒷받침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중국 기업의 기술 약진은 미국을 초조하게 했다. 저자는 이 불안이 무역전쟁의 발단이 됐다고 분석한다. 기술 패권의 중심엔 데이터가 있다. 알리바바그룹 창업자인 마윈은 5년 전에 “세상은 정보기술(IT)에서 데이터기술(DT)의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며 “데이터는 가솔린과 마찬가지로 경제 활동의 동력원”이라고 선언했다.
중국 최대 차량 공유업체 디디추싱만 봐도 알 수 있다. 디디추싱은 사실상 승객 개개인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보유하는 데이터 기업이다. 점을 선으로 잇고 선을 면으로 만들어 신호등 시간 조정과 도로 정비 등에 수집한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디디추싱의 고객인 운전자와 승객에게 편리함을 선사할 수 있다. 알리바바도 전자상거래와 알리페이를 통한 결제 서비스만 제공하는 게 아니다. 소비 패턴을 실시간으로 해석하고 다음 행보를 예측해 새로운 서비스를 창출해낸다. 지금까지는 주로 개인의 소비 생활에 영향을 미치던 데이터 분석, 인공지능(AI), 클라우드 기술 능력이 이젠 유통, 의료, 제조 등 전통 산업 영역으로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선 알리바바 텐센트 디디추싱 외에 ‘중국판 아마존’ 징둥그룹, 중국 최초의 민영은행 위뱅크, AI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동향도 파악할 수 있다. 중국 기업의 현장 모습뿐 아니라 정부의 발 빠른 전략을 통해 “디지털화의 조류에 중국 사회 전체가 올라탔다”는 저자의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규제, 풍부한 투자를 바탕으로 한 중국의 혁신 환경을 그리면서 규제의 빈틈을 파고든 사기와 기술 악용 등 급속한 디지털화의 어두운 단면도 들여다본다.
저자는 줄곧 미국 일본 기업을 중국 기업과 비교한다. 한국은 관심 밖에 있다. 저자가 노무라종합연구소에 몸담고 있는 만큼 중국의 기술 굴기에 따른 일본 대응에 주로 초점을 맞췄다. “지금까지처럼 일본이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중국 기업과 교류한다면 미래는 순탄치 못할 것이다” “처음부터 글로벌 전개를 염두에 둔 중국 기업이 언제까지나 움직임이 둔한 일본 기업을 상대해줄 것이란 보장은 없다” ‘일본’을 ‘한국’으로 바꿔 넣어도 어색하지 않을 문장들이다. “무엇보다 규제 완화로 기업이 속도감 있게 의사를 결정하고 도전해나갈 수 있는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정책 당국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