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는 독주 레퍼토리가 많지 않아요. 20여 년을 연주하면서 같은 곡을 반복하다 보니 시야가 좁아지는 것 같아 걱정됐습니다. 음악이라는 넓은 세계를 망원경으로 보고 싶은데, 현미경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요.”
25년 전 자기 키만 한 첼로를 들고나와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 우승을 거머쥐었던 소녀가 첼로가 아니라 지휘봉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110년의 역사를 지닌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서다. 2017년 트론헤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장한나(36·사진)는 13일 서울 예술의전당을 시작으로 14일 부산, 16일 대구, 17일 익산에서 지휘자로 관객을 만난다.
다니엘 하딩(1997~2000년), 크시슈토프 우르바인스키(2010~2017년)가 예술감독을 맡았던 트론헤임 오케스트라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다. 이 악단이 한국 무대에 서는 것은 처음이다. 이번 공연에서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 1번’,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협연하는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들려준다.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최연소로 정상에 섰을 때 장한나는 열두 살이었다. 이후 첼리스트로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미샤 마이스키, 로린 마젤 등 거장의 사랑을 받으며 주요 첼로 레퍼토리를 대부분 연주했다. 가는 곳마다 환호를 받았지만 그는 화려한 첼리스트로서의 삶에 안주하지 않았다. 지휘자로 새로운 도전의 길에 나섰다. 장한나는 11일 서울 소공동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위대한 작곡가들의 다양한 곡을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대학에 진학할 무렵부터 지휘를 생각했다”며 “악보를 며칠이고 뚫어지게 보니 눈과 귀가 열렸고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고 말했다.
2007년 성남국제청소년관현악페스티벌에서 지휘자로 데뷔한 장한나는 2009~2014년 성남문화재단 기획으로 ‘장한나의 앱솔루트 클래식’을 이끌었다. 2014년엔 카타르 필하모닉 음악감독으로 BBC 프롬스 무대에 섰다. 2015년엔 영국 BBC뮤직 매거진이 선정한 ‘현재 최고의 여성 지휘자 19인’에 이름을 올렸다.
클래식 음악계는 어떤 예술 분야보다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곳으로 꼽힌다. 볼티모어 교향악단 음악감독인 마린 옵솔,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수산나 멜키 등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여성 지휘자는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다. 장한나가 그중 한 명이다. “세상엔 여전히 많은 차별이 있겠지만 ‘어려서, 동양인이라서, 여자라서’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지휘대에 섰을 때 ‘실력 있는 지휘자’라고 하면 끝인 거죠.”
장한나가 트론헤임에서 공을 들이고 있는 레퍼토리는 말러 교향곡이다. 그동안 2, 5, 6, 7번을 선보였고 올 시즌 1, 3, 9번도 연주할 예정이다.
지휘봉이 아니라 첼로 활을 든 장한나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연주를 하려면 매일 6~7시간은 연습해야 합니다.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악보만 보는데 하루에 10시간이 금방 가요. 첼로는 내게 음악적 첫사랑이자 지휘자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해준 악기지만 ‘양다리’를 걸칠 순 없어요. 언젠가 다시 연주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지휘에 몰두할 겁니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