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의 R까기] "공부 열심히 한 게 죄"라는 17세 소녀의 하소연

입력 2019-11-11 09:02
수정 2019-11-13 15:24

어느 세대나 공부에 어려움은 있었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경험담을 들어보면, 학력고사건 수능이건 '대학가기 쉬운 시절은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교육과정과 교과서가 바뀌는 마지막 나이대들은 '재수하면 안된다'는 강박이 있기도 했다.

공부건 인생이건 불확실한 미래에 10대 학생들은 언제나 힘들었다. 때문에 보통의 어른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고3 스트레스를 집에서 참고 받아주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하지만 최근 정부가 내놓은 정책들을 보고 있자면 학생 뿐만 아니라 부모까지 잡는 게 아닐까 싶다. 학생들에게는 교육정책으로, 부모에게는 부동산 정책으로 동시에 괴로운 상태다. 현재 고등학교 1학년생들을 둔 학교 학생 부모들은 '패닉'에 가깝다. 특히 우수한 성적으로 특목고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은 더하다.

A양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했다. 맞벌이 부모의 관심도 있었지만, A양이 공부를 통해 느끼는 보람도 컸다. 예민한 탓에 시험기간 때마다 병원에 가기 일쑤였지만, 언어를 유달리 좋아했던 A양은 외고를 목표로 공부했다. 지난해 A양과 부모들은 고민에 휩싸였다. 외고의 선발시기를 변경하면서 일반고와 동시 선발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 지원했다가는 고등학교를 재수해야 한다는 불안한 마음이었다.

A양은 외고에 합격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예상보다 우수한 학생들이 많아 내신을 따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지난 4월 자립형사립고(자사고) 지원자의 일반고 중복지원을 금지한 고교 신입생 선발제도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오면서 학교가 술렁였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씩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국제고나 자사고를 목표로 공부하다가 외고로 방향을 틀었다는 얘기들이었다.

여기에 또 한번 학교를 흔든 건 최근 발표된 교육정책이었다. 정부는 최근 현재 고1이 대입을 치르는 2022학년도 대입부터 서울 주요 대학의 정시(수능위주전형) 비중을 확대하고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을 포함한 수시 비중이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2025년에는 자사고, 외고, 국제고를 일반고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고1은 문과와 이과가 통합된 '문이과 통합교육'을 받고 있다. 문이과 통합형으로 치러지는 첫 수능 세대가 될 전망이다. 급변하는 교육정책의 한가운데 있는 셈이다.


바빠진 건 부모들이다. 부모들은 '학종이건 수능이건 잡으려면 일반고가 낫다'고 판단해서다. 늦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일반고로 가야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A양의 학교도 마찬가지다. 경기도에 있는 외고다보니 이 학교에는 용인, 안성, 광주, 부천까지 다양한 지역의 학생들이 있다. 부모들은 이사할 필요가 없었고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일반고를 고려하면서 부모들이 이른바 명문학군으로 이사를 알아보고 있다.

"일주일 만에 2000만원이 올랐다", "집주인이 섣불리 계약될까봐 계좌번호를 안 알려준다", "집 보러 가기로 했는데, 매물을 아예 거뒀다" 등의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치솟은 집값에 서울까지는 엄두를 못낸다. 성남 정자동이나 안양 평촌 등으로 이사를 하려하지만, 이 또한 집구하기가 만만치 않다.

실제 부동산 시장은 분양가 상한제 지정에도 불구하고 강남권 주요 재건축 단지들의 상승세가 이어가고 있다. 9~10월 사이 신고가를 갱신한 실거래가가 등록되면서 시세가 오히려 상향 조정되고 있다. 서울 뿐만 아니라 분당, 중동, 동탄 등도 상승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예비 고1, 중학생을 둔 부모들도 소위 명문학군이라는 지역으로 이동을 알아보고 있다. 부모들의 집 걱정을 철든 아이들은 알고 있다.

집집마다 불화소식도 들린다. "괜한 고집으로 외고 보냈더니 이게 뭐하는 거냐", "전학가기 싫다. 학종 안되면 수능으로 가면 된다", "동생도 있는데 언니 때문에 무작정 이사가는 게 말이 되냐"…. 각 지역에서 공부를 제법했던 17세의 소년·소녀들은 교육정책의 파도를 정면으로 맞고 있다. A양의 친구 역시도 "내가 공부 열심히 한 게 죄다. 그냥 평범하게 일반고 갔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았겠냐. 멋진 외교관 되고 싶었는데 이젠 다 필요없다"라며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A양 역시 '교육정책 실험용 쥐'가 된 기분이라며 "정말 공부만 했으면 좋겠다"라고도 했다.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 7일 이렇게 얘기했다. 그는 "고교 체제의 개편이 강남 3구의 부동산에 영향을 미친다는 실질적인, 입증할 수 있는 자료나 실제화됐던 경우가 없었다"고 말이다. 심리적인 우려라고도 했다. 서울 대치동, 목동의 부동산에 전화 한 통이라도 해 보고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 묻고 싶다.

오는 14일은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다.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의 간절한 마음만큼 사건·사고없이 온전한 실력을 발휘하는 하루가 되길 기원한다.

김하나 한경닷컴 기자 ha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