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타고 싶으면 글로벌 '핵인싸'와 교류하라"

입력 2019-11-10 18:27
수정 2019-11-11 02:02
“같은 전공 분야의 세계 최고 수준 석학들과 합숙하면서 토론할 기회가 제 인생에 또 올까요?”(정연석 서울대 제약학과 교수)

“시골 비포장길을 달리다 갑자기 고속도로에 올라 탄 느낌입니다.”(이윤태 포스텍 생명과학과 교수)

지난 8일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주관으로 미국 새너제이 삼성미주법인(SDA)에서 열린 글로벌 리서치 심포지엄(GRS)에 참석한 국내 교수들의 후일담이다. 이들은 “전례 없는 학술 토론회를 경험했다”며 한껏 고무돼 있었다. 해외 학술대회에 참석했을 때 인사도 나누기 쉽지 않던 글로벌 석학들과 1박2일 합숙을 하며 콘퍼런스를 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파격적인 소수 정예 학술회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이 주최하는 GRS이 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GRS은 기초과학 분야의 글로벌 석학들과 국내 과학계의 교류를 위해 2015년부터 시작된 학술 토론회다. 국내외 학자들을 대규모로 초청해 학술회를 열던 관행을 과감하게 접고 지난해부터 새로운 형식의 학술회를 시작했다. 20명 안팎의 소수 정예로 멤버를 꾸려 해외에서 행사를 여는 방식이다. 올해는 백혈구의 일종으로 인체 내부 면역 시스템의 두뇌 역할을 하는 T세포를 연구하는 세계 석학 12명을 실리콘밸리에 불러 모았다. 국내에선 이 분야의 톱 클래스 교수와 박사급 연구원 등 총 9명이 참여했다.

“T세포를 처음 발견해 면역 치료의 신기원을 연 마크 데이비스 스탠퍼드대 교수가 오늘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동물 대신 인간의 살아있는 장기를 대상으로 면역 실험을 할 수 있는 혁신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하더군요. 아직 논문으로 발표하기 전 결과입니다. 관련 정보를 얻고 싶다고 하니 흔쾌하게 허락했습니다.”(신의철 KAIST 의과대학원 교수)

이미 국내외 탄탄한 입지를 구축한 국내 과학자들이 단지 1박2일의 이번 학술 토론회에 이처럼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이날 인터뷰에 응한 교수들은 한목소리로 “세계적인 학자들과 인맥을 구축할 실효성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연석 교수는 “조찬부터 시작해 저녁 늦도록 함께 시간을 보내고도 더 이야기를 하고 싶어 밤 늦게까지 호텔 방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더라”며 “한국인 학자 타이틀로선 이런 형태의 만남을 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고 전했다. 신의철 교수는 “그동안 한국의 과학계는 미국, 유럽 등 주류 학계와 동떨어진 ‘갈라파고스 섬’과 같았다”며 “콘텐츠를 해외 무대에 제대로 알릴 하나의 통로를 찾았다”고 했다. 본인의 연구 과제에 대한 석학들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점도 긍정적인 효과다. 김성근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서울대 화학부 교수)은 “교수들이 받은 긍정적인 효과가 10점이라면 학생들이 받을 효과는 100점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의 후광효과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관계자는 “삼성의 역할은 단지 멍석을 깔아준 것”이라며 “오히려 비용은 과거 대규모 행사에 비하면 3분의 1 정도로 줄었다”고 말했다. 학술회가 당초 취지와 다르게 국내 학계의 친목회로 변질되자 학술회의 형식과 일정에 변화를 줬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참석 대상을 추리고 초청하는 주요 업무는 국내 연구진이 맡았다. 하지만 이들도 삼성의 후광효과가 작지 않다고 전한다. 김 이사장은 “삼성 이름으로 초청하면 평소 바쁘다던 석학들이 학생들까지 대동하고 온다”고 귀띔했다.

이런 학술 교류가 중장기적으로 국내 과학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것이라는 게 학계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김 이사장은 “노벨상도 결국 사람이 정하는 일”이라며 “학계 인사이더(내부자)들과 교류를 하고 인맥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리콘밸리=좌동욱 특파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