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구자균, 교수서 48세때 늦깎이 경영자로…숨어있던 '장사꾼 DNA' 깨어나

입력 2019-11-08 17:24
수정 2019-11-09 00:43
“양푼 김치찌개집 가면 되겠네. 용산에 내가 자주 가는 단골집이 있어요.”

지난 1월 사내 행사장에서 만난 구자균 LS산전 회장(62)에게 ‘한경과 맛있는 만남’ 인터뷰를 요청하자 돌아온 대답이다. 오너 회장의 단골집이라기엔 지나치게 소박했다.

지난달 23일 그가 정한 음식점인 서울 한강로3가 옛촌숯불돼지갈비를 찾았다. 허름한 식당 벽 빛바랜 종이에 쓰인 글귀가 눈에 띄었다. ‘진짜 맛있습니다. 25년 단골 구자균.’ 식당에 들어선 그가 말했다. “주인 아저씨가 만두가게를 할 때부터 어머니가 단골이셨어요. 손바닥보다 큰 목살 덩어리에 묵은지를 통째로 넣는데…. 벌써 침이 넘어가네요.”


장사꾼 DNA와 우애 깊은 3형제

구자균 LS산전 회장은 재벌 2세다. 하지만 TV에 나오는 재벌 2세와는 결이 다르다. 대학 졸업 후 경영수업을 받는 여느 후계자들과 달리 미국 유학길을 택했다. LG그룹과 LS그룹을 통틀어 구씨 가문의 ‘1호 박사’다. ‘잘나가는’ 대학교수이던 그는 48세에 돌연 ‘늦깎이 경영자’로 경영계에 입문했다. 취미이자 특기는 스쿠버 다이빙.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다. 3분40초 무호흡 잠수 기록을 보유한 프로급이다. 지금까지 잠수 경력은 3000회. 대학교수 시절엔 강사 자격증도 땄다.

‘회장님표 코스 요리’의 첫 메뉴는 오겹살이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오겹살 한 점과 파채무침, 구운 마늘을 넣은 상추쌈을 손에 올리고선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럭키집 아들’로 태어났다. LG그룹(옛 럭키금성)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다섯 번째 동생인 고(故) 구평회 E1 명예회장이 그의 아버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 저녁 때 집에서 아버지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고 했다. 구 명예회장이 1967년 호남정유를 세울 때의 일이다. “밤낮없이 사람을 만나고는 아침마다 그 얘기를 저희에게 들려주셨어요. ‘밥상머리 교육’이라고 했던가요. 그 얘기들이 제 안에 ‘장사꾼 DNA’를 심어준 것 같습니다.”

저녁 시간 아버지의 빈 자리를 메워준 건 든든한 형들이었다. 주로 ‘육체적인 대화’였다. 흑백 TV에 프로레슬러 장영철이 나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형들의 ‘복습’이 시작됐다. 코브라 트위스트를 비롯한 고난도 기술의 실험 대상은 늘 막내인 구 회장이었다. “저희 3형제의 우애가 각별한 건 몸으로 부대끼며 자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형제간 다툼이 벌어지는 재벌가를 보면 ‘어린 시절 우리처럼 스킨십이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더군요.”

어린 동생을 상대로 화려한 ‘방구석 경기’를 펼쳤던 두 사람이 구자열 LS그룹 회장과 구자용 E1 회장이다. 어린시절 나눴던 진한 스킨십은 경영 분쟁 없이 LS그룹을 경영하는 ‘형제경영’의 뿌리가 됐다.


과시하지 않는 삶

형들과 우애는 깊었지만 삶의 궤적은 달랐다. 대학 졸업 후 경영 일선에 뛰어든 형들과 달리 경영학 석사학위를 따기 위해 1982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에게 “유학 시절 ‘눈물 젖은 빵’은 먹어 봤느냐”는 질문을 하자 “그게 구씨 집안의 주특기”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100원 한푼도 내주지 않았다. 대학 시절 만난 부인은 구 회장의 행색을 보고 주유소집 아들인 줄 알았다고 한다. 대학생 때 집에서 싸 준 도시락을 중국집에 가져가 짬뽕 국물과 바꿔먹었다는 얘기를 할 때쯤 양푼에 푹 끓인 김치찌개가 나왔다. 진한 고기 육수와 묵은지가 계속 숟가락을 끌어당겼다.

유학생활도 마찬가지였다. 학비를 내고 나니 생활비가 빠듯했다. 다른 재벌가 자녀들이 포르쉐를 타고 다닐 때 그는 1974년형 하늘색 포드 투도어 차량을 1200달러에 샀다. 구 회장은 “당시 유학생들과 함께 집을 빌려 살았는데, 내가 좋은 차를 몰고 다니면 위화감을 조성할 것 같았다”며 “그때부터 과시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충성주’ 제조하는 교수님

1993년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로 임용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교수사회에서도 구 회장은 ‘아웃라이어’였다. 사교성이 좋았고, 사업가적 기질도 있었다. 총장들은 그에게 학교 일을 맡기려고 했다. 임용 2년 만에 학과장을 한 데 이어 대외협력실장까지 맡았다.

원로 교수와 후배 교수들의 단합을 위해 부지런히 술도 샀다. 다른 교수들이 식겁할 만한 사건도 있었다. 원로 교수를 모시고 간 식당에서 구 회장이 일명 ‘마빡주’로 불리는 ‘충성주’를 선보인 것. 이마로 식탁을 세게 내리쳐 폭탄주를 만드는 기술(?)이었다. “교수사회는 워낙 개인주의적이거든요. 수평적인 교수사회에 수직적인 문화를 좀 불어넣어보자고 생각했죠.”

1997년 모교인 고려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2003년 교환 교수로 미국에 갔을 때 LG그룹에서 LS그룹이 분리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구 회장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숨어있던 ‘장사꾼 DNA’가 꿈틀댔다. “아버지, 회사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LS그룹으로 분리하는 회사들의 면면을 들여다봤다. LS니꼬동제련이나 LS전선, E1은 모두 안정적인 수익원이 보장되는 회사들이었다. LS산전은 달랐다. 실적이 고르지는 않았지만 개척할 여지는 무궁무진했다. 2005년 LS산전 관리본부장(부사장)으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회사에 온 뒤로는 더 이상 충성주를 만들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내가 먹이사슬 꼭대기에 있지 않습니까. 수직적인 회사에서는 반대로 수평적인 문화를 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수직 버리고 회사로

대신 2년 동안 180개 팀 직원들을 만나 소주를 마셨다. 간 수치가 눈에 띄게 높아질 정도였다. 평사원들을 팔씨름으로 이기기도 했다. 스킨십 경영이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만난 평사원이 그에게 물었다. “좋은 교수 자리를 버리고 왜 여기에 오셨습니까?”

직원의 당돌한 질문에 구 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 직원들을 잘 먹고 잘살게 해 주고 싶어서 왔습니다.” 회사 직원 3500명에 딸린 가족까지 포함하면 LS산전 가족은 1만 명이 넘는다. 구 회장은 “이들의 삶이 나에게 달려 있다는 ‘다르마(운명)’가 느껴졌다”고 했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 그는 가게 ‘주특기’인 칡냉면을 꼭 맛봐야 한다고 했다. “비빔냉면과 물냉면이 있는데, 난 비빔냉면에 얼음 띄운 육수를 부어 먹는 게 맛있더라고요.”

그는 기업으로 온 목적을 달성했을까. LS산전의 지난해 매출은 2조4850억원, 영업이익은 2051억원을 기록했다. 2003년 LG그룹에서 계열 분리한 이후 최대 실적이다. 요즘 관심사는 적절한 보상과 직원들의 스트레스 관리 등 정서적인 부분이다. “밀레니얼세대는 오히려 성과주의를 추구합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며 충성심을 강요하던 시대는 지났어요. 성과에 따른 충분한 보상을 통해 능력을 인정해줘야 로열티도 생깁니다.”

별을 향해 가자, 역경을 통해

새콤달콤한 칡냉면으로 입가심을 하는 줄 알았더니 그가 말했다. “디저트로 왕만두도 한 번 먹어볼래요?”

평범한 분식집 만두처럼 생겼지만 육즙이 남달랐다. 만두를 하나 더 권하는 그에게 ‘경영자로의 변신’이 힘들었던 순간은 없었는지 물었다. 그는 “오히려 지금이 가장 힘들다”고 답했다. 이유를 묻자 “국내외 경영환경이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줬다. 잠금 화면에는 ‘ad astra, per aspera(별을 향해 가자, 역경을 통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금은 힘들지만 이 역경을 통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내년에는 해외 사업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 회사에 1만 명의 인생이 달려있으니까요.”

■ 구자균 LS산전 회장 약력

△1957년 서울 출생
△1976년 서울 중앙고 졸업
△1982년 고려대 법학과 졸업
△1990년 미국 텍사스대 대학원 경영학 박사(기업 재무 전공)
△1993년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
△1997년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2005년 LS산전 관리본부장 (부사장)
△2008년 LS산전 대표이사 사장
△2010년 LS산전 대표이사 부회장
△2015년~ LS산전 대표이사 회장
△2019년~ 산업기술진흥협회장


■구자균 회장의 단골집 옛촌숯불돼지갈비

목살·묵은지 통째로 넣은 김치찌개…왕만두도 일품

서울 한강로3가에 있는 옛촌숯불돼지갈비는 ‘백화점식으로 다양한 메뉴를 파는 식당은 맛이 부족하다’는 편견을 깨는 곳이다. 숯불돼지갈비, 삼겹살, 김치찌개, 칡냉면, 왕만두 등 다양한 이 가게 음식에는 식당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30년 가까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진수일 사장은 1990년대 초반 이촌동 한강쇼핑센터 계단 옆 고기만두집으로 시작했다. 1996년에는 가게 규모를 넓혀 칡냉면을 팔기 시작해 동네에 이름을 알렸다. 여름에는 칡냉면을, 겨울에는 떡볶이와 어묵을 팔았다고 한다. 구자균 LS산전 회장 부부는 이때부터 이 가게 단골이 됐다. 10년 전 임차료가 올라 가게를 옮기면서 돼지갈비와 김치찌개를 팔기 시작했다. 여름에는 칡냉면이, 겨울에는 돼지고기 목살과 묵은지를 포기째 넣고 끓인 김치찌개가 인기다.

식당의 ‘원조 음식’인 왕만두는 풍부한 육즙이 일품이다. 맛은 물론 가성비가 좋아 동네 주민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고재연/정인설/황정수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