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기업하기 가장 좋은 나라' 싱가포르에 길을 묻다

입력 2019-11-07 18:42
수정 2019-11-08 00:53

델컴퓨터와 시만텍, 인피니언은 ‘이곳’에 아시아 본부를 두고 있다. IBM이 아시아·태평양 클라우드 데이터센터를 세우고 스마트 도시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기도 하다. 2015년엔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 맥킨지가 이곳에 디지털 캠퍼스를 마련했고 이듬해엔 신용카드 회사 비자가 디지털 플랫폼 개발을 위해 이노베이션센터를 열었다.

7000개가 넘는 다국적 기업이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싱가포르다. 싱가포르의 면적(725㎢)은 서울(605㎢)보다 조금 더 넓다. 인구는 한국의 10분의 1 수준이다. 작지만 강하다. 싱가포르의 2018년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세계 6위다. 미국(7위) 스웨덴(10위) 독일(15위) 영국(19위) 일본(23위)보다 높다. 한국은 26위다. 켄트 E 콜더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소장은 저서 <싱가포르, 스마트 국가의 최전선>에서 “국제 경쟁력, 시장 친화도, 반부패 등 각종 글로벌 성과지표에서 싱가포르는 항상 상위권에 있다”며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이라는 점이 놀랍다”고 서술한다. 세계은행은 2006년부터 10년간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싱가포르를 선정했다. 정부 정책 입안 및 결정 과정에서의 투명성과 공정성에 대한 신뢰, 지식재산권 보호 분야에서도 싱가포르는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일본 실장을 지내고 일본 주재 미 대사관 특별자문위원, 동아시아 문제 관련 국무부 차관 특별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한 콜더 소장은 40년 넘게 아시아를 연구해왔다. 그는 빠르게 변하고 치열하게 경쟁 중인 글로벌 경제사회에서 이 작은 도시국가가 어떻게 탄탄한 경제력과 남 부럽지 않은 사회보장 체제를 갖추게 됐는지에 의문을 품었다.

저자는 거대한 다른 나라나 초국가적 기구들이 지닌 복잡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독특한 정부 구조에서 그 답을 찾았다. 싱가포르는 유엔 193개 회원국 중 하나인 국민국가인 동시에 강한 응집력을 지닌 단일 도시 공동체다. 국가로서는 작지만 도시로는 크다. 그는 “국제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면서도 도시 국가로서 실용적이고 유연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며 “싱가포르의 이중성은 새로운 글로벌 패러다임을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런 특성을 지닌 싱가포르를 ‘스마트 국가’로 명명한다. 스마트 국가는 국가가 정책을 주도하고 변혁을 이끄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고 조정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나라다. 정부는 사회보장, 경제개발, 국가안보를 수행하면서도 각 분야에서 최소주의를 지향한다. 저자는 시민과 시장이 자립해 성과를 내도록 돕는 게 스마트 국가의 전형적인 통치 방식이라고 강조한다.

효율적인 국가 구조를 기반으로 싱가포르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실행된 정책과 기술을 테스트해볼 수 있는 시험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개발도상국에서 겪는 주택, 교통, 환경 문제 등에는 기술 위주의 접근으로 대응책을 마련했고, 서구의 보건 복지 프로그램보다 더 실속 있고 경제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인구밀도가 높지만 천연자원이 없는 것은 싱가포르와 한국의 공통점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 높은 주거비, 낮은 출산율, 커지는 경제 양극화 등 그늘진 부분도 닮았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싱가포르의 성공에서 배울 만한 점을 제안한다. 우선 정책을 세울 때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통합적으로 접근하라고 조언한다. 싱가포르는 현금성 복지 혜택보다는 주택 구입과 민간 저축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사회안전망을 제공한다. 정부 예산의 20% 이상은 교육에 투자한다.

국제무대에서 위상을 높일 수 있도록 외교 역량도 강화할 것을 주문한다. 싱가포르는 1990년대 초부터 중국과 대만의 양안관계를 협상하는 장소였고,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처음 만난 곳이다. 중립적인 무대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때로는 중요한 의제를 직접 설정할 만큼 큰 존재감을 갖고 있다. 저자는 “싱가포르의 산업, 주택, 자원, 교통 정책은 한국과 비슷하다”며 “초강대국을 대하는 방식은 물론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와 사회기반시설 관리에 있어서도 싱가포르는 좋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