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Sapa)는 베트남 북부 여행의 백미다. 해발 1650m 고원이 빚어낸 ‘안개 속 마을’에 가면 도시의 세파쯤은 눈녹 듯 사라진다. 베트남과 중국의 접경 지역에 태고적부터 터를 잡고 살아왔을 소수민족의 삶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사파 여행의 매력이다. 하노이와 하롱베이 여행의 부록 정도로 사파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궤도를 바꾸는 게 상책이다.
사파는 라오까이(Lao Cai)성에 있는 산악 마을이다. 사파 타운에 가려면 라오까이역에서도 약 40분 간 구절양장길을 올라가야 한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산골 소로지만, 승합차가 양 방향으로 다닐 수 있는 이 길이 놓인 건 자그마치 100년 전이다.
한때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던 프랑스인들은 1903~1905년 지도 제작 차원에서 탐사를 하다 사파라는 진주를 ‘발견’했다. 라오까이와는 달리, 연평균 기온 15도의 청명하고 시원한 날씨에 반해 이곳을 일종의 군사 휴양지로 삼았다. 계곡을 따라 라오까이와 사파를 잇는 길을 1909~1912년에 개척했고, 1924년엔 차가 다닐 만큼 도로를 확장했다. 1927년 사파 타운 전역에 전기가 공급되고, 1930년엔 라오까이와 사파를 잇는 통신망이 개설됐다. ‘인프라’ 확충과 함께 사파는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관광지’로 변모를 거듭했다. 1909년 첫 민영 호텔이 들어선 이래 1914년엔 하노이 북부를 관할한 통킹 총독의 여름 별장이 지어졌다. 사파 타운 중심에 있는 유서깊은 호텔인 메트로폴(그랜드 호텔 드 사파)이 45실 규모로 완공된 게 1932년이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하노이에서 사파를 가려면 장장 8시간을 완행 야간 열차에 몸을 실어야했다. 20대 청춘이라면 4인 기준의 침대 객실에서 보내는 야간 열차의 추억을 한번쯤은 쌓아볼 법 하다. 하루 숙박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럼에도 에어콘 굉음과 열차 소음을 참아가며 새우잠을 자는 게 싫다면, 버스나 9인승 리무진을 타고 고속도로를 타보는 것도 대안이다. 철도 여행에 비해 이동 시간이 절반에 불과한 데다 낮에도 이동할 수 있어 피로감이 덜하다. 도로 여행엔 단점이 하나 있는데, 굴곡진 도로 사정 탓에 자칫 멀미에 시달릴 수 있다. 하노이~라오까이 도로처럼 베트남 건설사들이 최근 시공한 고속도로는 하천이나 강을 만나면 거의 예외없이 낮은 ‘뜀틀’ 모양의 길이 되곤 한다. 마치 과속 방지턱을 일부러 만들겠다고 작정한 것 같다. 철도, 도로 여행 모두 장단점이 뚜렷하니 고루 한번씩 이용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하노이에서 서북쪽으로 달리는 길은 홍강의 수원을 찾아가는 길이다. 가는 내내 오른쪽 차창에 홍강의 물줄기가 뚜렷하다. 베·중 국경을 넘어 티벳 고원에서 시작된 홍강은 하노이를 관통해 베트남 동해(남중국해)로 빠져 나간다. 중국 대륙을 통치한 역대 왕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베트남 북부를 장악하길 원했는데, 홍강의 물줄기를 따라가는 이 길은 약 1000년 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현장이었다. 처절했던 역사의 흔적은 이제 온데간데 없다. 사파로 가는 길은 마치 영월 동강이나 강원도로 가는 북한강을 보듯 잔잔한 서정을 불러일으킨다. 고원 지대로 갈수록 하노이나 하롱 인근의 뾰족한 석회암 산들은 사라지고, 황톳빛 강빛을 닮은 토산들이 나타난다. 시멘트 공장 대신, 벽돌 공장이 간간히 보인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 숙소를 어디에 잡느냐가 사파 여행의 동선을 결정한다. 메트로폴을 중심으로 사파 타운엔 천차만별의 호텔들이 즐비하다. 사파 호수를 비롯해 유럽인들이 선호하는 레스토랑도 이곳에 밀집해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높은 판시판산을 오르기 위한 첫 출발지도 메트로폴이다. 이곳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케이블카 정거장까지 가도록 설계돼 있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캇캇 마을도 택시로 10분이면 갈 수 있다. 다만, 요즘 사파 타운은 곳곳이 공사 현장이어서 자칫 홍보용 사진만 보고 골랐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다. 하루종일 포크레인을 굉음을 들어야할 수도 있고, 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이라고 해봐야 새로 올라가는 호텔들의 엉성한 골조뿐일 수도 있다.
좀 더 자연 친화적인 여행을 원한다면, 사파 타운에서 벗어나길 권한다. 필자가 묵었던 곳은 신서유기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던 클레이하우스였다. 흐멍족의 마을인 라오차이로 가는 길 중간에 자리잡은 작은 리조트다. 가족들만을 위한 별도 객실과 아담한 풀(pool)까지 갖췄다. 유명세 덕에 한국 관광객들로 북적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유럽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로 붐볐다. 작은 산골 마을의 호텔치고는 가격이 비싼 편이지만, 앞마당에서 보는 경치 만큼은 백만불짜리다. 저녁이면 손에 잡힐 듯 안개를 만나고, 아침이면 암탉의 울음이 자명종을 대신하는 곳이다. 쉐프와 리셉셔니스트까지 가족들이 운영하는데 음식과 서비스 모두 수준급이다.
사파를 찾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트래킹이다. 산길을 따라 소수 민족들의 삶을 여과없이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수많은 유럽의 배낭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대표적인 트래킹 코스는 두 곳이다. 우선, 캇캇 마을을 꼽을 수 있다. 공사 현장의 먼지와 수시로 경적을 울리며 매연을 뿜어대는 자동차만 개의치 않는다면, 사파 타운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다. 캇캇 마을은 사파 트래킹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곳이다.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잘 꾸며진 민속촌이라고 할 수 있다. 흐멍족들이 직접 만든 각종 공예품들을 싼값에 구매할 수 있는 데다 풍광 자체가 아름답다. 폭포의 시원한 물줄기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 프랑스인들은 블랙흐멍족의 마을인 ‘캇캇’에 1925년 수력 발전 설비를 건설했다. 반나절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관광지다.
좀 더 소수민족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면 라오차이 마을을 지나 다반까지 이어지는 트래킹 코스를 걸을 수 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소수민족 여성 가이드와 함께 걷는 길이다. 멀리서 바라만 보던 다랭이 논밭을 직접 걸으며,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흡입할 수 있으니 이만한 호사가 없다. 1인당 30달러 정도면 현지식으로 점심까지 해결할 수 있다. 캇캇 마을의 ‘상업성’이 싫어 라오차이 트래킹을 택한 이들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길을 나서자마자 등에 광주리를 맨 여인들 3~4명이 동행을 자처하는데 결국 길의 끝에선 동행의 보상을 요구한다. 동네 아이들도 수줍은 듯 다가와 팔찌를 파는 일이 다반사다. 모두 ‘애교’로 봐 줄 수 있는 수준이고,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산행의 동반자들이었던 지라, 지불한 돈이 그리 아깝지는 않았다.
가이드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영어의 힘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산골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마을마다 학교 하나씩 갖추고는 있지만, 초등교육이 고작이다. 중등 교육 이상을 받으려면 라오까이로 나가야 한다. 영어를 한 번도 배워보지 않은 그녀들이 가이드라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은 영어는 곧 돈이라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을 안내한 20살의 그녀는 교과서 하나 없이 오로지 눈치만으로 배운 영어 실력 덕분에 남편의 대학 뒷바라지까지 도맡았다. 2박4일의 사파 여행 중 휴대폰 카메라에 담았던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본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무미 건조한 하노이에서의 삶에 활력소가 되는 것 같다. 역시, 사파는 베트남 여행의 백미다.
박동휘 하노이 특파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