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어느 곳을 둘러봐도 이웃 나라 사이의 관계는 ‘사랑과 증오(love & hate)’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영토 분쟁, 전쟁 같은 갈등 요인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교역, 문화 교류 같은 호혜적 요인도 있다.
우리가 보기에 마냥 사이 좋은 이웃 국가 같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도 애증(愛憎)이 심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앞장서 국경에 장벽까지 쌓으며 멕시코인의 불법 이민에 증오를 드러내고 있지만, 역사적 앙금 때문에 멕시코인들의 가슴 속에도 미국에 대한 증오가 깔려 있다. 지금은 멕시코인들의 텍사스 불법이민이 문제이지만, 19세기 전반에는 미국인들의 텍사스 불법이민이 문제였다. 당시에는 텍사스는 물론 애리조나,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미국 서부 땅이 멕시코 영토였다. 그런데 미국과의 전쟁(1846~1848년)에서 패해 그 넓은 땅을 거의 반강제로 빼앗긴 것이다. 물론 미국의 역사는 이 땅을 정당하게 돈을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
요즘 우리도 이웃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고 있다. 학교에선 어린 학생들에게 반일(反日) 감정을 주입하고, 집권세력은 일본 상품을 안 사는 것이 애국인 것처럼 교묘하게 국민을 오도(誤導)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도 편하지 않다. 중국이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을 풀지 않아 아직 한류, 교역 등에서 앙금이 쌓여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일본놈” “중국놈”이라고 분개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보다 강한 두 나라에 대해선 이렇게 분개하면서 “태국놈” “베트남놈”이라곤 안 부른다. 한국인의 이런 이중적 반응은 중국의 속국, 일제 식민지 통치가 우리에게 준 역사적 상처에 대한 자학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일제 36년의 고역을 치르고 6·25전쟁 때 중공군의 불법 침입으로 서울을 함락당해 그 추운 겨울 피란을 가야 했던 나이 든 기성세대에게는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웃 나라에 대한 이 같은 증오를 젊은 세대에게 대물림해서는 절대 안 된다.
다행히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기성세대보다는 젊은 세대가 상대국을 더 호의적으로 보고 있다. 한국동아시아연구원이 일본과 손잡고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기성세대에서 일본에 호의적인 사람은 26%에 불과하지만 우리 젊은 세대(19~29세)는 42%가 일본에 호의적이다.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호의도도 똑같다. 기성세대보다는 젊은 세대가 한국을 훨씬 더 호의적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지난 세기 두 번이나 전쟁을 하며 싸웠다. 독일군의 군화에 짓밟힌 프랑스 기성세대는 ‘나치’란 단어만 들어도 치를 떤다. 하지만 두 나라 젊은이들 사이에는 역사의 아픈 상처가 전혀 없다. 두 나라 정부와 지도층이 젊은 세대에게는 증오의 감정을 남겨주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1963년 1월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총리와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만나 ‘두 나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자’는 엘리제조약을 맺었다. 외교, 문화, 교육에서 긴밀히 소통하고 교류하며 두 나라 외교장관 회의를 정례화했다. 특히 두 나라 젊은 세대의 교류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사실 역사를 되새겨 보면 ‘나쁜 독일’과 ‘좋은 독일’이 있다. 나치 독일은 분명 나쁜 독일이었다. 하지만 전후 민주화된 독일은 좋은 독일이다. 그래서인지 프랑스인들은 나치 독일은 철저히 증오하지만 평범한 독일인을 적대시하진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우리의 이웃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6·25전쟁 때 한반도를 짓밟은 중국은 ‘나쁜 중국’이다. 하지만 오늘날 긴밀히 교역하는 그들은 ‘좋은 중국’이다. 우리를 식민지배한 일제(日帝)는 ‘나쁜 일본’이다. 그러나 전후에 우리와 긴밀히 경제협력을 하고 미·일 동맹으로 맺어진 그들은 ‘좋은 일본’이다.
이웃 나라 일본, 중국과의 관계는 상호주의다. 우리가 그들을 증오하면 일본과 중국에서도 혐한(嫌韓)의 불길이 타오른다. 나쁜 이웃의 역사적 앙금은 기성세대가 끌어안고, 좋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젊은 세대에게 심어줘야 한다. 문제는 정치다. 프랑스와 독일 지도자들과는 달리 동북아 3국의 지도자, 특히 한국의 집권 세력은 ‘이웃 나라 후려치기’를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교묘히 악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