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논점과 관점]'50년 복지 축적' 허무는 5년 정권

입력 2019-10-29 18:27
수정 2019-10-30 09:18
‘내 삶을 책임지는 나라’를 표방하고 반환점에 도달한 문재인 정부의 복지 성적표가 낙제점이다. 양극화는 속도가 역대급이다. ‘하위 20% 가구’의 가처분소득도 올 2분기까지 6분기 연속 줄어 최장 기간 마이너스 행진중이다.

‘노인 알바’ 자리를 만들고, 청년들에게 현금을 쥐여주고, 아동 수당도 1년 새 세 배로 늘렸지만 복지 퇴보가 뚜렷하다. ‘복지의 핵심’인 건강보험 고용보험 노인장기요양보험 산재보험 국민연금 등 ‘5대 사회보험’이 고갈 위기에 직면한 것이 분명한 증거다.

5대 사회보험의 추락을 짚어보면 극적인 느낌이 든다. 건강보험은 정확히 ‘문재인 케어’가 본격화된 작년에 적자 전환했다. 향후 10여 년 동안 연 4조원 안팎의 손실이 불기피하다. 2017년 말 21조원에 달했던 ‘준비금’ 적립액도 7년 만인 2024년께면 거덜날 전망이다.

고갈로 치닫는 '5대 사회보험'

고용보험도 사정은 비슷하다. 실업급여 지급이 급증하면서 6년간의 흑자 행진이 지난해 마감됐다. 올 실업급여 예상 적자는 1조3000억원(국회예산정책처 추정)에 달한다. 이대로라면 5조원 넘게 쌓인 적립금이 2024년을 넘기기 힘들다. 노인들에게 목욕 간호 등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적자도 눈덩이다. 2016년 432억원이던 손실은 올해 7530억원으로 17배 급증하며 수년 내 법정준비금 고갈 사태를 예고했다.

국민연금의 부진은 시한폭탄급이다. 수익률을 1%만 높여도 고갈 시점이 6년 늦춰지는 상황에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했다. 전주로 이전한 뒤 3년 동안 107명의 운용전문가가 이탈한 데 따른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런데도 연금 개혁은 표류 중이고 이사장의 총선 출마설만 무성하다.

쌓이는 적자는 그대로 국민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다. 고용보험료가 바로 이달부터 23% 올랐고, 7년간 건강보험료 대비 6.5%에 묶여있던 노인 장기요양보험료율도 지난해 7.38%, 올해 8.51%로 급등했다. 내년에도 최고 인상률을 예고하고 있다. 통상 1%를 밑돌던 건강보험료 인상률 역시 올해 3.49%, 내년 3.20%로 크게 높아졌다.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국민의 생애를 책임지겠다”던 문 대통령의 장담을 무안하게 만든 이런 결과는 잘못 설계된 복지정책의 역설이다. 1960년대 이후 모든 정부는 시대적 소임에 충실하며 복지 여력 축적에 노력해왔다.

5년 만에 거덜나는 사회안전망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첫 복지제도인 산업재해보험(1964년)을 도입했고, 1977년에는 의료보험(건강보험제)을 시행했다. 전두환 정부는 국민연금법, 노태우 정부는 고용보험제로 사회안전망을 크게 강화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라는 족적을 남겼고,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장기요양보험을 도입했다. 이명박 정부는 능동적 복지를 선보였고, 박근혜 정부는 기초연금제를 시행했다.

50여 년의 한국 복지정책 역사는 지속가능성과 축적에 방점이 찍혀 있다. 1973년 국민연금법이 제정됐지만 오일쇼크를 피해 1988년에야 시행된 데서 잘 드러난다. “언제나 복지가 최우선”(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이라는 균형감 상실은 복지의 축적보다 소진으로 치달을 개연성이 높다.

미국처럼 적자국채를 무한정 찍어도 잘 돌아가는 기축통화국이라면 좋겠지만, 한국은 전혀 다르다. 내년 적자국채 발행액이 60조원을 웃도는 상황에서 복지의 궤도 이탈은 재정과 성장 잠재력을 잠식할 수 밖에 없다. 속도 조절을 통해 ‘복지 축적’의 과정으로 회귀하는 일이 급선무다. 부모 세대로부터 넘겨받은 ‘복지 바통’을 자식 세대로 잘 전달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