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거처 '큰 복 지닌…어디서 찍어도 인생샷

입력 2019-10-29 15:58
수정 2019-10-29 16:09
경복궁

경복궁은 ‘만년토록 빛나는 큰 복을 지닌 궁궐’이란 뜻을 갖고 있다. 하늘의 뜻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며, 대대손손 태평함을 이어가겠다는 조선 왕조의 소망이 담겨 있다. 이 소망을 이뤄나가기 위한 조선 왕조의 대표적 법궁이기도 하다. 법궁은 왕이 머무는 궁궐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궁궐을 의미한다.

경복궁은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했다.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에 둘러싸여 있고, 그 중심에 청계천이 흐르는 곳에 자리 잡았다. 공간은 크게 정치공간 외전, 생활공간 내전, 휴식공간 후원으로 나뉜다. 외전과 내전은 광화문을 기준으로 남북 방향의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주요 전각에 딸린 부속 전각들이 좌우 대칭을 이룬다.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돼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췄다는 평가다.

궁궐 내부 중 드넓은 자리엔 웅장한 건물 ‘근정전’이 우뚝 솟아있다. 경복궁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화려하게 장식된 처마 아래로 앞머리를 가지런히 자른 말(馬) 모양의 석각이 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다 보니 산을 닮아버린 근정전의 추녀가 하늘로 매끄럽게 솟아올라 두 산과 절묘하게 이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역대 왕들의 즉위, 책봉, 혼례와 같은 중대 의식을 거행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근정전 입구에는 임금만이 오를 수 있는 계단인 ‘답도’가 있다. ‘밟는 길’이라는 의미의 답도에는 구름 속에서 날개를 활짝 펼친 봉황새가 조각돼 있다. 태평성대를 기원한다는 의미다. 근정전 앞에 넓게 펼쳐진 조정에는 정해진 위치에 따라 왕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문관, 무관이 일렬로 선다.

경복궁은 수난의 역사를 품고 있다. 태조가 세운 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 이후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됐다.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자 했던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됐지만 건청궁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진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대피하면서 왕이 떠난 빈집의 운명이 되고 만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내에 지어 조선 왕조의 상징을 훼손하려 했다. 정문인 광화문 또한 해체해 지금의 건춘문 자리 근처로 옮겨졌고, 궁궐 내 대부분 건물도 철거해 근정전 등 일부 중심 건물만 남게 됐다. 이후 광화문은 1968년 복원됐고, 경복궁은 복원 작업을 거쳐 광복 65년을 맞은 2010년 공사를 마치고 일반에 공개됐다.

덕수궁 - 아기자기한 궁, 데이트장소 인기

덕수궁의 역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시작된다. 선조는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해 ‘시어소’로 정해 행궁으로 삼았다. 이 행궁은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됐지만 규모는 점점 축소됐다.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었고, 인조가 즉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다. 이로써 덕수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그랬던 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직후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이곳에서 고종은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덕수궁은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춘다. 하지만 1904년 일어난 화재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이후 덕수궁 규모는 다시 축소됐다. 이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도 바뀐다. 덕수는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의미다.

1930년대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으로 개조해 공개했고,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개관해 일본 근대미술품을 전시했다. 돈덕전이 있던 자리에는 동물원이 들어서기도 했다. 덕수궁은 1963년 사적 124호로 지정된 이후 꾸준히 복원작업이 이뤄졌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축소돼 온 탓에 덕수궁은 경복궁처럼 웅장한 느낌은 없다. 하지만 아기자기하고 아늑하기 때문에 가족 또는 연인들과 함께 산책하기에 좋은 명소로 꼽힌다. 궁궐 중간 연못 옆에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건물인 석조전이 있다. 고전주의 양식의 철골 콘크리트 건물로 황궁의 정전(왕이 나와서 조회를 하던 궁전)으로 기획돼 1910년 준공됐다. 석조전 동관은 현재 대한제국역사관,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다.

고종이 정전으로 사용한 중화전은 원래 2층 건물이었지만 1904년 화재 후 단층 건물로 중건됐다. 중화전은 정문인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돼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가면 정동극장 뒤쪽 중명전에 이른다.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의 황실 도서관으로, 현재는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창덕궁 - 신비한 후원…자연의 美에 반하다

창덕궁은 조선 왕조의 공식 궁궐인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궁궐이다. 건축과 조경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동시에 한국적인 공간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꼽힌다.

창덕궁은 이궁으로 지어졌다. 이궁이란 나라에 전쟁이나 큰 재난이 일어나 공식 궁궐을 사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한 궁궐을 말한다. 경복궁이 정궁이었지만 왕들은 창덕궁의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신비한 후원 때문에 창덕궁을 더 선호했다고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이 모두 불타면서 경복궁은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았다. 광해군 시절 창덕궁이 먼저 재건된다.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됐다.

궁의 동쪽으로는 창경궁이, 동남쪽으로는 종묘가, 서쪽으로는 정궁인 경복궁이 있다. 창덕궁은 1411년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 궁궐의 정문인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들어서면서 궁궐의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돈화문으로 들어서면 임금이 신하와 국가의 일상 업무를 논하던 편전인 선정전, 임금이 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인정전, 왕과 왕비가 거주하던 대조전으로 이어진다.

창경궁 - 17세기 지어진 명정전…조선왕궁 법전 중 最古

창경궁은 1483년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세종 즉위년 1418년에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 조성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돼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한다.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했다. 성종대에 창건된 창경궁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됐고 1616년에 재건됐다. 하지만 1624년 이괄의 난과 1830년 화재로 인해 내전이 모두 소실됐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명정전은 국왕의 즉위식과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 행사를 치렀던 장소다. 인종이 1544년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가 치러지기도 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