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자갸'는 표준어, '자기'의 높임말이죠

입력 2019-10-28 09:00
10월은 유난히 한글과 우리말 발전에 기념비적인 날이 많은 달이다. 우선 지난 9일이 제573돌 한글날이었다. 세종대왕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3년 뒤인 1446년 이를 반포했다.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 지금의 한글날이다. 훈민정음 반포일이 음력으로 ‘9월 상한’이라는 기록(훈민정음해례본)을 토대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 정해졌다.

‘조선어 표준말 모음’으로 우리말 바로 세워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한 게 1933년 10월이다. 이는 일제의 식민 지배하에서 우리 고유의 글자인 한글을 지키고 널리 보급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던 노력의 결실이었다. 통일안이 나옴으로써 비로소 ‘우리말을 한글로 어떻게 적을지’에 대한 합리적이고 일관된 기준이 갖춰졌다. ‘한글 맞춤법’의 기초 얼개도 이때 짜였다.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총칙 제1항은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맞춤법 기본정신이다.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쓴다’는 원칙도 마련됐다.

3년 뒤 1936년 10월 28일에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이 나왔다. 83년 전 오늘이다. 당시에는 우리말을 지키고 바루기 위해 표준어 사정작업이 절실했다. 예를 들면 하나의 대상을 두고 ‘하늘, 하눌, 하날’ 식으로 제가끔 쓰였다. 이를 ‘하늘’로 통일한 것이다. 그렇게 사정한 어휘 수가 9547개였다. 그중 6231개가 표준어로 채택됐고 3082개는 비표준어로 분류됐다. 나머지는 약어 134개, 한자어 100개였다.

표준어 사정작업은 내용적으로 우리말사(史)에서 두 가지 의의를 지녔다. 하나는 같은 대상을 두고 여러 다른 표기가 쓰이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우리말의 섬세한 어감 차이를 살려야 할 필요가 절실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사정작업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이윤재 선생은 그해 말 <한글>지에 게재한 글에서 이를 상세히 설명했다.

이성 간 “자기야~”는 옛말 ‘자갸’에서 유래?

“아롱아롱, 알롱알롱, 아롱다롱, 알롱달롱, 알록달록…(중략)… 조선말이 얼마나 형용하는 말의 갈래가 많아 그 미묘한 뜻을 나타내었는가를 가히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어사전이란 데는 조금만 뜻이 근사한 것이면 덮어놓고 동의어로 처리하여 위에 예를 든 ‘아롱아롱’에 관계된 말 삼십에 가까운 것을 전부 같다고 하여 놓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거론한 ‘조선어사전’은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식민지 언어정책의 일환으로 펴낸 국어사전을 말한다. 일제의 우리말 훼손에 맞서 낱낱의 말맛이 다 다르다는 것을 밝혀 이를 지키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표준말 모음’은 우리말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한눈에 찾아볼 수 있는 ‘우리말 보고(寶庫)’다. 지금도 많이 헷갈려 하는 재떨이와 재털이(×)가 당시에도 섞여 쓰였는데, 그때 이미 ‘재떨이’를 표준으로 삼았다. 채비(差備·차비×), 응달(陰달·음달×) 등을 통해 한자음이 변해 우리말화한 지 꽤 오래됐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중 ‘자갸’라는 말도 눈에 띈다. 이 말은 자가(自家·‘당신’이란 뜻)에서 변한 말이다. 원말인 ‘자가’를 제치고 ‘자갸’가 표준어로 올랐다. 3인칭 대명사인 ‘자기’를 예스럽게 조금 높여 이르는 말이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지만 옛 신문을 보면 1960년대까지 이 말을 간간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자기야~”는 이성 간에 상대를 부르는 말로 흔히 쓰인다.

이런 부름말은 전통 어법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긴 하지만, 그 발상이 아주 생뚱맞은 것은 아니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