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영조가 들려주는 愛民의 요체…"백성은 갓난아이다"

입력 2019-10-24 17:58
수정 2019-10-25 00:41

조선 영조 43년 6월에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싣고 오던 조운선이 침몰해 2만 석의 쌀이 상하고 냄새가 나 못 쓰게 됐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400명에 가까운 격군(格軍·뱃사공을 돕는 사람)이 투옥됐다. 그러자 영조가 친히 명을 내렸다. “(그들을) ‘배의 격군’이라고 말하지 말라. 역시 나의 백성이며 곧 나의 ‘갓난아이(적자·赤子)’다. 어사가 아뢴 바를 듣건대 ‘수천 명에 달하는 가족이 북쪽을 바라보며 울부짖고 있다’ 하니 마치 직접 그것을 듣는 듯하다.” 영조는 “아침밥이 차마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느냐”며 각 배의 도사공(사공의 우두머리)만 처벌하고 나머지 사공과 격군은 풀어주도록 명했다. <영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선의 21대 군주였던 영조는 가장 장수한 왕인 동시에 가장 오래 재위한 왕이었다. 무려 52년간 왕위를 지키면서 탕평책, 균역법, 형벌제도 개혁 등 수많은 업적을 쌓았다. 스스로 학문을 즐기고 문물을 정비해 정조시대까지 이어지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특히 지금의 대통령 연설비서관처럼 신하들이 지어 올린 교서가 아니라 즉석에서 장문의 전교(傳敎)나 교서를 직접 지어 반포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 때문에 ‘왕의 말씀’을 폭넓게 뜻하던 보통명사 윤음(綸音)은 영조 이후 왕이 직접 지은 글만을 이르는 특정 문서의 형식으로 뜻이 바뀌었다.

<영조윤음>은 김백철 계명대 사학과 교수가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열성어제(列聖御製·조선시대 역대 왕이 쓴 시문을 수록한 책), 비변사등록 등에 실린 영조의 윤음 300여 편을 찾아내 그중 185편을 한글로 번역해 엮은 책이다. 윤음은 개인적인 감흥을 읊조린 글부터 조정 신료들을 타일러 경계하거나 백성들에게 내리는 가르침까지 대상이 다양했다. 형식도 딱딱한 문어체가 아니라 말하듯이 돼 있어 영조의 감정과 생각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윤음의 내용은 새해 첫날이나 동지 등 특정 절기에 반포한 윤음부터 탕평·균역·형벌·인사·재정 등의 개혁과 재해·재난 대책, 목민관의 자세, 금주·사치 금지 등 일상의 영역까지 아우른다. 그중에서 영조가 즉위 원년부터 붕당을 경계하고 탕평을 강조했던 윤음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절절하다.

“지금은 한쪽 편 사람을 모조리 역당(逆黨)으로 몰고 있다. ‘세 사람이 가도 어진 사람과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어찌 한쪽 편 사람이라고 모두가 같은 무리라는 이치가 있겠는가.” “사람을 쓰는데 (같은) 당색(黨色) 안의 사람이 아님이 없으니, 이와 같이 하고도 자연섭리의 공정함에 합하고 온 세상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비와 이슬이 지역을 가려서 내리지 않듯이, 백성을 위해 관리를 가리는데 어찌 출신 지역을 가릴 수가 있겠는가.”

지금 들어도 찔끔해지는 윤음이다. “조선은 거대한 붕당의 나라가 됐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영조 30년에는 “겉으로는 붕당이 없는 듯하나 속으로는 실로 예전 그대로다. 한밤중에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떨린다”며 열흘 동안 수라를 줄여 스스로를 경계했다.

영조는 평생 술과 사치를 멀리했다. “100가구의 살림살이를 허비해 한 사람의 욕심을 받든다”며 상류층의 사치 풍조를 비판했고, “술은 맛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실로 미치게 하는 약”이라며 경계했다. 종묘에는 술 대신 식혜를 올리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군사들에겐 탁주(막걸리)를 먹이고, 농민들의 보리술과 막걸리는 금하지 말도록 했다.

영조는 백성을 ‘갓난아이’라며 군왕과 관리들에게 그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푸르고 푸른 하늘이 나에게 부탁한 것도 백성이고, 선왕의 영령이 나에게 의탁한 것도 백성이다.(…) 백성을 아끼지 않고 구제하지 않으면 백성의 마음은 원망할 것이고 하늘의 명도 떠나갈 것이다. 비록 임금의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곧 (역성혁명의 대상이 되는) 일개 사내일 뿐이다.”

탕평책과 균역, 인사·재정의 개혁 등을 통해 영조가 추구한 것은 결국 백성이었다. 형벌정책의 경우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처벌에 신중을 거듭하도록 강조했고,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낙형(烙刑), 무릎을 짓누르는 압슬(壓膝) 등의 고문을 폐지했다. 별건 수사를 금지하라는 대목도 있어 눈길을 끈다. 영조 25년의 실록에는 반란죄나 임금 모욕에 관한 것 외에는 붕당이나 뇌물죄에 관계되는 경우라도 다른 사건을 국문장에 가져와 추궁하지 못하게 했다. 어길 경우 어명 위반으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나이 50이 되도록 시집, 장가를 들지 못하는 공노비의 삶을 안타까워하고 나라에 바치는 공물을 줄이거나 폐지한 것, 제주도 귤의 진상을 금한 것 등도 그런 애민의 발로였다. 길이도 내용도 제각각이지만 책에 실린 185편의 윤음을 읽노라면 정치란 무엇인가, 지도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