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터키에서 쿠르드 비극을 직접 접하고, 오랜 현지 조사를 거쳐 국내 학술논문으로 집중 발표한 시점은 1992~1995년이었다. 그로부터 25년이 흘렀다. 자치와 독립이라는 절박한 꿈은 조금도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여전히 4000만 명의 쿠르드인은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지에서 소수민족으로서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국제사회는 오늘도 ‘세계 최대의 유랑민족’ ‘배신의 역사’라는 수식어로만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전하고 있다.
강대국들은 1920년 8월 세브르 조약을 통해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고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존중해 쿠르드인의 독립을 천명했다. 전쟁에서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서 강대국들은 그러나 추악한 발톱을 다시 드러냈다.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고 터키가 독립전쟁에 승리하면서 강하게 저항해 오자, 영국과 프랑스는 1923년 로잔 조약에서 3년 전 세브르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렸다. 독립은커녕 쿠르드 지역을 다섯 나라로 쪼개 각각의 나라에서 소수집단으로 살아가게 만든 것이다. 쿠르드인들의 비극과 울분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강자에게 붙어서 살아남는 법을 체득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이 와해되자 재빨리 영국에 붙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세상의 무게중심이 미국으로 옮겨가자 미국 편으로 돌아섰다. 2013년 이라크 전쟁 때는 미국과 함께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최근 시리아 내전에서도 쿠르드 민병대(YPG)가 반(反)아사드 전선의 선봉에 섰다. 미국을 도와 이슬람국가(IS) 중심세력을 소탕하는 데 최소 1만 명 이상을 희생시키며 미국의 이익을 지켰다. 미국과의 구체적인 이면 합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IS 제거 대가로 상당한 수준의 시리아 내 쿠르드 입지 확보, 궁극적으로 연방제를 통한 자치권 확대를 약속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 점이 터키를 자극했다. 시리아 내전에서 터키가 일찌감치 아사드 정권 퇴진을 내세운 것은 시리아 정부가 자국 내 쿠르드 세력을 활용해 터키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해왔기 때문이다. 내전 이후 시리아 쿠르드가 강력한 무장 상태로 터키 남쪽 국경지대에 포진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미국이 이를 지원한다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자국 내 반정부 무장조직인 쿠르드 노동당(PKK)이 접경한 시리아 쿠르드와 본격적으로 연대한다면 터키의 국가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엄중한 사태가 벌어질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터키는 여러 차례 미국에 시리아 쿠르드 민병대에 대한 군사지원 중단을 요구했고, 시리아 쿠르드 지역에서 미군 철수를 주장해왔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양국 동맹 손상은 물론 궁극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까지 거론하며 미국을 압박했다. 시리아 쿠르드 지역에 미군을 주둔시키며 상황을 관망하는 미국에 터키는 시리아 쿠르드와의 관계 청산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아사드 정권의 강력한 후원자로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중동에 대한 미국의 헤게모니를 잠식해 들어오는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딜레마에 빠졌다. NATO 공군력의 핵심 국가인 터키가 러시아제 S-400 미사일 방어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양국 관계 갈등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이는 NATO 체제 붕괴를 예고하는 대이변이었다. 터키가 이란, 러시아 등과 삼각편대를 형성해 미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권력 지도를 그리자 트럼프 행정부는 시리아 쿠르드를 버리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사태의 핵심적 사안이다.
IS 궤멸에 앞장선 시리아 쿠르드를 지켜야 하는 의리와 신의보다는 터키라는 50년 NATO 맹방을 잃고 이스라엘 안보와 미국의 절대국익이 달려 있는 중동 정책 구도가 약화되는 국익 손실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미국은 터키의 시리아 쿠르드 침공 허가를 내주고 말았다. 전 세계가 반대하고 있어 성공할 가능성이 낮아 보이지만 터키의 공격으로 쿠르드인들은 다시 한번 ‘이용과 배반’이란 비극적 운명을 되풀이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