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법률회사(로펌)간 국제 중재 전문가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태평양의 국제 중재 ‘간판스타’ 김갑유 대표변호사가 국제 중재 전문 로펌 설립에 나서면서, 로펌업계의 국제 중재 분야에서도 ‘격변기’를 맞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경을 초월한 기업 투자가 확대되면서 국제 중재 자문 시장이 급성장하는 것도 국제 중재 전문가 영입 경쟁을 달구고 있다.
말레이시아 버자야그룹 계열사 ‘버자야 랜드 버하드’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4조4000억원 규모의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한 가운데 국내 대형 로펌간 수임경쟁도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2012년 제기된 5조3000억원 규모 론스타 ISD 이후 가장 큰 규모의 ISD이기 때문이다.
◆김앤장, 율촌, 태평양에서 잇따라 영입
한국 정부는 그동안 론스타 엘리엇 메이슨 게일 버자야 등 외국 투자자들로부터 10건의 ISD를 당했다. 피청구액만 13조5000억원에 달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후 7건의 ISD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정부도 비상이 걸렸다. 자유무역협정(FTA), 투자보장협정(BIT) 등으로 무역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지만 외국투자자들의 역차별에 따른 분쟁도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ISD는 수익성면에서 다른 사건과 비교가 안될 정도”라며 “국제중재는 로펌입장에선 ‘블루오션’”이라고 말했다.
김앤장법률사무소는 법무법인 율촌에서 ISD 소송을 이끌던 김세연 변호사를 영입했고 앤드류 화이트 미국변호사와도 한솥밥을 먹기로 했다. 법무법인 태평양으로부터는 매튜 크리스틴 미국 변호사를 영입하기로 했다. 김앤장 국제 중재팀에서 중추적 역할을 해온 리처드 메너드 미국변호사가 갑작스런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공격적인 인재 영입 전략을 취하고 있다.
김앤장 국제 중재팀은 윤병철 변호사(팀장)를 주축으로 박은영 공동 팀장, 임병우 이철원 변호사 등이 활약하고 있다. 윤 변호사는 국제 로펌 평가기관 ‘체임버스 아시아 퍼시픽’의 2019년 한국 국제 중재 분야 개인 분야에서 최고 등급을 받았다. 그는 싱가포르 국제중재센터 최초 한국인 이사를 거쳐 현재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 상임위원을 맡고 있다.
김앤장은 국내 최대 로펌답게 해외 로펌간 네트워크가 화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로펌내 건설팀, 조선·해상팀, 조세팀, 기술 특허팀, 중국팀, 일본팀, 프랑스팀, 독일팀 등과 유기적인 협업시스템을 갖췄다는 점도 강점이다. 2012년에는 국제중재 전문지인 GAR이 선정하는 세계 30대 로펌 가운데 24위에 올라 아시아 로펌 중에서 역대 최고 순위를 기록했다.
◆국제중재 2~3위권 ‘지각변동’예고
태평양은 ‘포스트 김갑유 시대’를 맡게 됐다. 1996년부터 24년간 국제 중재팀에서 활약하며 태평양의 국제 중재 경쟁력을 키워온 김 대표가 내년 1월 국제 중재 전문 로펌을 설립하며 태평양을 떠나게 돼서다.
김 대표는 국제중재인으로 활약해온 볼프강 피터 변호사와 자신의 이름을 딴 국제 중재전문 로펌 ‘피터앤김(가칭)’을 내년 1월 출범한다. 유럽과 아시아, 오세아니아 기업 고객을 상대로 하며 서울 싱가포르 제네바 호주 등에 법인을 둔 다국적 로펌이다. 피터앤김은 국내에선 태평양과 경쟁하지 않고 컨소시엄을 이뤄 공동 마케팅에 나서고 해외에선 선의의 경쟁을 펼쳐나가기로 했다.
태평양은 김 대표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내부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방준필 미국변호사(싱가폴 중재센터 상임위원) 팀장을 중심으로 김 대표와 오랜 기간 중재 경험을 쌓았던 김홍중 김준우 윤석준 정경화 변호사, 데이비드 맥아더 외국변호사 등이 팀을 이끌어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태평양은 국내 최대 규모 ISD(5조3000억원)인 론스타와 쉰들러 사건에서 정부를 대리하고 있다.
가장 공격적으로 전문가 영입에 공을 들이고 있는 법무법인 광장은 국제 중재팀 변호사 수가 50여명으로 태평양과 비슷해졌다. 광장은 얼마 전 율촌에서 그레이스 윤 외국변호사를, 세종에서 론스타 사건을 맡았던 한상훈 변호사와 함께 원정연 외국변호사를, 화우에서는 정기창 변호사를 식구로 맞아들였다.
이전에도 광장은 김앤장에서 하노칼 사건을 맡았던 주현수 변호사, 세종에서 데이비드 김 캐나다 변호사, 법무부 국제법무과에서 임아영 변호사를 각각 스카우트했다.
해외에서도 인도변호사를 최근 영입한 데 이어 원자력 에너지 전문가(찰스 패터슨 변호사), 독일 변호사(오아힘 노박)를 영입해 국제중재 분야에 투입했다.
임성우 변호사가 이끄는 광장 국제 중재팀은 엘리엇과 메이슨, 게일 등 정부를 상대로 제기된 대형 ISD 소송 사건을 잇따라 수임하면서 인력 수요가 더 커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약 준비하는 세종 율촌 화우
법무법인 세종은 김범수 변호사가 KL파트너스로 독립한 이후 한때 주춤했다가 이제는 국제 중재 경쟁력을 완전히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두식 세종 대표변호사가 국제분쟁해결그룹장으로 전면에 나섰고, 국제분쟁해결팀장인 전재민 변호사를 비롯해 이승민 윤영원 변호사 등 ‘2세대 ISD 전문가’들이 여러 대기업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은 한국서부발전을 단독 대리해 작년 10월 인도 정부를 상대로 4000억원대 ISD를 제기했다. 또 한국수자원공사가 조지아에서 진행 중인 1조원대 수력발전사업 관련 분쟁도 자문하고 있다.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된 ISD에서 외국기업 쪽 자문을 독식해온 KL파트너스는 최근 김앤장에서 건설중재 전문가인 현대중공업 출신 오동석 변호사와 박영석 변호사를 잇따라 영입하며 세를 키우고 있다.
법무법인 율촌은 지난해 영입한 백윤재 변호사가 국제 중재팀의 수장이다. 백 변호사는 국제중재실무회 부회장, 서울국제중재센터 감사 출신이다.
율촌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당시 법무부 국제법무과에 근무했던 이형근 변호사, 대한상사중재원에서 국제중재인으로 활동한 안정혜 변호사, 한국인 최초의 러시아 국제상사중재원인 이화준 러시아변호사 등이 활약하고 있다. 율촌은 국내 공기업과 세계 최대 전사적자원관리시스템(ERP) 솔루션 개발사 사이의 라이선스 계약 관련 국제상업회의소(ICC) 중재에서 국내 공기업을 대리한 경험이 있다.
법무법인 화우는 한국 정부에 처음으로 ISD 승소를 안겨준 주역이다. 미국 동포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토지수용 관련 ISD에서 정부 국제투자 분쟁대응단(단장 이용구 법무부 법무실장)를 대리했다. 이준상 변호사가 팀장인 화우 국제중재팀은 최근 차지훈 변호사와 김연수 영국변호사를 영입했다.
김진희 외국변호사가 이끄는 지평 국제분쟁팀은 올해 헬스케어 분쟁 전문가인 함병균 외국변호사를 영입했다. 지평은 해외 로펌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국내 건설 대기업을 대리해 영국계 다국적 기업이 제기한 ICC 건설 중재에서 대승을 거둔 경험(작년 10월)이 있다.
대륙아주 국제소송중재팀은 버자야 ISD와 관련해 법무부로부터 입찰제안요청서(RFP)를 받은 국내 7개 로펌 가운데 한 곳으로 알려졌다. 대륙아주 국제소송중재팀은 티모시 디킨스 변호사와 이종원 변호사가 이끌고 있으며, 한국 로펌으로는 드물게 아프리카지역 분쟁 자문 경력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법인 바른의 국제중재팀은 윤원식 변호사와 피난스키 미국변호사가 공동팀장을 맡고 있으며 국내 대형 건설사, 원자력발전 관련 회사, 해운사 등을 대리해 다양한 국제 중재사건을 수임했다.
◆버자야 ISD 자문 놓고 한판승부
법조계에 따르면 법무부는 지난 7일 김앤장 광장 율촌 세종 화우 지평 대륙아주 등 국내 로펌 7곳에 RFP를 발송하며 버자야 ISD 관련 정부 대리 로펌 선정에 착수했다. 버자야그룹이 ISD를 통해 한국 정부에 청구한 돈은 4조4000억원으로 론스타 ISD 이후 가장 많다. 역대 세번째 조(兆) 단위 ISD다.
버자야그룹은 자신의 한국 법인인 버자야제주리조트가 제주 예래휴양형 주거단지 개발사업에 투자했는데 대법원의 사업무효 판결로 중딘되면서 재산피해를 당했다며 지난 7월 ISD 중재의향서를 제출했다.
정부 대리를 맡으면 ‘최고 훈장’이라고 할만한 트랙 레코드(자문실적)를 쌓을 수 있는 데다 최소 수백억원의 자문 수입이 예상되기 때문에 로펌들은 총력전 태세를 갖추고 있다.
버자야 ISD 수임전은 김앤장과 광장이 선두권에서 대결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율촌과 세종이 명예 회복을 위해 벼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율촌과 세종은 앞서 정부의 게일 ISD 자문 경쟁 입찰에서 광장에 근소한 차이로 밀렸을 정도로 경쟁력이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게일 ISD에서 입찰 가격면에서 선두권을 지킨 화우 역시 ‘다크호스’로 꼽히고 있다. 첫 ISD 승소 경험과 ISD전문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역전’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