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의 R까기] 꿈을 악몽으로 바꾸는 '도 넘은 수주전'

입력 2019-10-15 15:23
수정 2019-10-15 16:26

트라우마인가. 많이 보던 광경이다. 홍보전담 OS(outsourcing) 요원을 투입하고 경쟁 건설회사를 비방한다. 정부가 수주전을 혼란에 빠뜨리는 건설사를 시장에서 퇴출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여러차례 밝혔지만, 수주전은 흑색선전과 비방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

정부는 그동안 재건축·재개발 등과 같은 정비사업을 '가격 통제의 수단'으로 여겼다. 새로 공급될 일반분양 아파트의 분양가를 통제하고, 대출을 압박해서 가계대출을 줄이고자 했다. 정비사업 조합들은 시장의 한 축인 공급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가격'을 맞추기에만 급급했다. 기본적인 '공급질서'에 대한 역할이 흐려지다보니, 이 틈을 건설사들이 수주전을 통해 파고들고 있다.

물론 정부의 눈총은 매서워졌다. 건설사들은 과거처럼 돈을 뿌려대거나 편법으로 금품을 제공한다는 약속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말'과 '글'이라는 날선 칼을 휘두르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올해 서울 강북 최대 규모의 재개발인 한남3구역이다. 사업비만 1조8000여억원에 달하는 한남3구역은 시공사 입찰을 오는 18일 오후 2시 마감한다. 다음달 28일 시공사 선정을 위한 1차 합동 설명회를 갖고 12월15일 시공사가 최종 선정된다. 최초 참여의사를 밝혔던 5개 업체 중 가장 치열하게 뛰는 회사는 현대건설, GS건설, 대림산업이다.

가장 먼저 단독시공 의향을 밝혔던 대림산업은 지난달 20일 신한은행, 우리은행과 한남3구역 재개발 사업비 조달을 위한 각각 7조원 규모 금융협약을 체결했다. 현대건설은 지난 10일 500억원 규모 입찰 참가 보증금을 가장 먼저 완납했다. GS건설은 '한남자이 더 헤리티지'란 단지 브랜드명을 공개하고 혁신적인 설계를 16일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공식적인 행보로만 보면 차질없이 흘러가는 것 같지만, 현장에서는 과거와 다름없는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건설사들은 때로는 티나게 때로는 은밀하게 서로를 비난하고 있다. 일부 건설사는 홍보전담 OS 요원 300여명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GS건설은 과거 실적과 낮아보이는 지표만 홍보하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대림산업 추정 홍보물), "묻지마 수주 대림산업! 재건축 사기극 현대건설! 꿈이 악몽이 되는 대림·현대!"(GS건설 추정 홍보물), "부채왕! 하자왕! 소송왕! 부담왕! 글로벌 4대천왕"(현대건설 추정 홍보물) 등 원색적인 문구가 담긴 홍보물들도 곳곳에 펼쳐졌다.

조합원들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잡음이 커질 경우 사업이 지연될 수 있어서다. 한남3구역은 주변에 재개발을 추진중인 한남 2, 4, 5구역 보다 속도가 빠르다. 그만큼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건설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주전에 뛰고 있는 상황이다.

한남3구역 한 조합원은 "건설사들의 진흙탕 싸움이 도를 넘어서며 조합원들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며 "자칫 소송전으로 치닫거나, 사업이 지연돼 조합원들이 피해를 입게 될까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조합원들과 전문가들은 서울시청과 용산구청 등 관할 기관이 수주전부터 철저한 단속과 행정지도를 해야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동안 정부는 수주전 이후에 뒤늦게 합동점검을 하거나 지침을 내리리곤 했지만, 이번에는 초기부터 단속에 나서야 한다는 게 조합원들의 목소리다. 올해 초 국토교통부는 반포주공 1단지 3주구와 대치쌍용2차, 개포주공1, 흑석9, 이문3 등 5개 정비사업 조합을 대상으로 합동점검을 진행한 결과를 발표했다. 총 107건의 부적격 사례를 적발해 수사의뢰, 시정명령 및 행정지도 등의 조치를 하기로 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2017~2018년 사이에 벌어진 일을 대상으로 했다.

수주전과 관련, 기본 대책을 내놓은 건 지난해 2월이었다. 강남 주요 재건축 사업장에서 금품 살포, 이사비 지원 등의 문제가 불거지자 ‘정비사업 계약업무 처리기준’을 고시, 시공사 선정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했다. 수주전에 나서는 건설사들은 합동홍보설명회나 지정공간에서 사전에 등록된 직원만 홍보를 할 수 있다. OS요원은 조합원을 상대로 개별적인 홍보를 할 수 없고 조합원의 집을 직접 찾아가는 것은 물론 인터넷 홍보도 불가하다.

조합원들에게 금품을 제공하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약속하는 것도 금지됐다. ‘삼진 아웃제’도 도입해 개별홍보가 세 차례 이상 적발되면 시공사 선정 입찰이 무효로 처리되고, 다른 정비구역 수주 참여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한남3구역의 수주전은 이미 과열 양상이다.

2017년 9월로 시계를 되돌려보자. 서울 서초구 반포주공1단지(1·2·4주구) 재건축 시공사 선정 임시총회에서 현대건설이 시공사로 선정됐다.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가 적용되기 직전 막바지로 관리처분인가 신청을 마무리해 인가를 받으면서 환호를 받았다. 이렇게 건설사만 선정하면 알아서 흘러가는 사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분양 신청을 두고 조합원 간 갈등이 발생하면서 소송전과 비방전 등이 이어졌다. 반포주공 1단지 재건축은 최근 관리처분인가 무효 판정을 받았다. 이달부터 예정됐던 주민 이주에 차질이 생겼고, 사업 지연이 확실한 상태다. 예상 사업비 10조원, 공사비 규모만 2조2000억원에 이르는 꿈의 사업은 이렇게 '악몽'이 되고 있다.

수주전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 건설사들의 비방전에 휩쓸려 조합이 내부적으로 분열이 나는 사례는 수도 없었다. 정비사업 조합이라면 정부와 지자체의 도움과 협조를 통해 공급질서를 지키면서 시장의 든든한 한축이 되길 기대해본다.

김하나 한경닷컴 기자 ha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