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코노미] 초치기·버스 대절…미계약분 '줍줍' 백태

입력 2019-10-15 11:02
수정 2019-10-15 11:03

“1시간 만에 1000만원을 쐈는데 100등에도 못 들었다네요.”

‘건대입구역 자이엘라’ 오피스텔 분양에 낙첨한 정건우(가명) 씨의 말이다. 정씨는 이 오피스텔의 미계약분 청약 때 선착순 당첨을 노렸지만 떨어졌다. ‘초치기’에서 밀린 탓이다. 초치기란 입금 순서를 초단위로 따졌을 때 앞선 사람부터 당첨 자격을 주는 분양 방식을 말한다.

◆“일단 입금부터”…초치기 분양

지난 14일 진행된 서울 자양동 건대입구역 자이엘라 오피스텔 잔여호실 모집엔 이른바 ‘초치기 청약’이 등장했다. 오전 10시를 기준으로 가장 먼저 입금한 청약자에게 계약자격을 주는 방식이다. 초단위로 당락이 엇갈려 초치기로 불린다. 준비물은 청약증거금 1000만원이다. 초치기 1시간 만에 미계약분 35실의 분양이 끝났다. 분양관계자는 “500명 이상이 증거금을 송금했지만 11시 이후 입금한 이들은 100위권 밖으로 밀렸다”고 전했다.

아파트의 경우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에선 순위 내 모집과 잔여가구 모두 인터넷청약이 의무화됐다. 하지만 오피스텔은 규모가 300실 이상일 때만 금융결제원의 아파트투유 홈페이지로 청약을 받는다. 현장 청약을 진행하는 모델하우스마다 긴 줄이 늘어서자 2017년 ‘8·2 대책’을 통해 정부가 내놓은 조치다. 그러나 이마저도 잔여가구 청약은 해당되지 않는다. 오피스텔 분양에 적용되는 ‘건축물의 분양에 관한 법률’과 이 법 시행령은 미계약분에 대해 사업 주체가 수의계약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어서다.


이 같은 이유로 오피스텔 청약은 통상 분양대행사 직원들이 사전 모집을 받는다. 인터넷청약에 경쟁이 몰리더라도 실제 계약에선 변심 등으로 인한 미계약분이 다수 나오기 때문에 이 물량을 받아낼 투자자를 미리 찾는 것이다. 당첨자들의 정당계약 기간이 지나 미계약분의 숫자가 결정되면 사전에 의향을 밝힌 이들에게만 초치기용 계좌번호를 알려준다. 한 분양대행사 관계자는 “초치기를 할 고객을 많이 확보해야 계약률이 높아지고 인센티브도 늘어난다”며 “순식간에 당락이 결정되다 보니 관리하는 고객들에게 사전에 송금 연습을 시키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여의도 옛 MBC 부지에 짓는 ‘여의도 브라이튼’ 청약 때도 이 같은 초치기 분양이 오피스텔 시장을 휩쓸었다. ‘청량리역 롯데캐슬 SKY-L65’의 오피스텔 청약도 연말 광풍이 예고된 단지다.

하지만 선착순 분양 방식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초치기 청약을 포기한 한 투자자는 “미계약 분 중 잘 팔릴 물건은 시행사가 따로 빼뒀다가 나중에 판매한다”면서 “투자 등급이 떨어지는 물건들만 당장 안 하면 놓칠 것처럼 바람을 넣고 초치기를 진행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연 수익률이 3%밖에 안 나올 단지인데 초치기를 통해 인기가 높은 것처럼 호도한다”면서 “주변 시세, 월세 등을 철저히 따져본 뒤 청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非규제지역에선 ‘버스대절·줄피’

지방 부동산시장에선 미계약 물량을 잡기 위해 버스까지 대절해 ‘원정 줍줍(줍고 줍는다는 신조어)’에 나서는 이들이 나오고 있다. 지난달 당첨자를 발표한 아파트 ‘포레나천안두정’은 이달 초 진행한 잔여가구 모집 첫 날에만 모델하우스에 2680명이 몰렸다. 선착순 추첨에 당첨될 경우 즉시 1000만원을 내고 계약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장에 268억원가량의 현금이 몰린 셈이다.

이 아파트는 1043가구 모집에 874명이 지원하는 데 그쳐 169가구가 미달됐다. 전체 6개 주택형 가운데 4개 주택형이 2순위 청약에서도 순위 내 경쟁을 마감하지 못하면서 결국 선착순 계약으로 이어졌다. 청약통장이 필요하지 않은 데다 분양권 전매제한이 없는 까닭에 계약 즉시 되팔 수 있어 전국에서 분양권 투자자들이 몰렸다. 중도금을 무이자 조건으로 지원하는 점도 한 몫 했다.

아파트 선착순 계약은 모델하우스에 도착한 순서대로 추첨 번호표를 받는다. 번호표가 여러 개일수록 당첨될 확률도 높다 보니 즉석에서 ‘줄피(대신 줄을 서는 것에 대한 프리미엄)’ 형태로 번호표가 거래된다. 이날 잔여가구 모집에 참여한 B씨는 “동네 할머니들도 줄피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왔더라”며 “추첨 1시간 전엔 1000만원이던 웃돈이 나중엔 200만원까지 내려갔다”고 전했다. 대전과 세종, 대구 등에서도 투자자들도 몰렸다. 분양 관계자는 “인근 지역에서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오기도 했다”며 “정당계약에서 소진된 물량은 40%가량이었지만 선착순 분양을 거치면서 계약률이 두 배 이상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미계약 물량 추첨은 올해 2월부터 아파트투유 홈페이지를 통해 진행되도록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이 개정됐다. 그러나 천안은 조정대상지역이 아닌 까닭에 이 같은 규정을 적용받지 않는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청약제도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부동산시장을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모델하우스 줄세우기’를 막겠다며 잔여가구의 인터넷 추첨을 제도화했지만 정작 비(非)규제지역엔 적용되지 않다 보니 웃돈 장사를 하려는 투자자들만 몰리고 있는 것이다. 시행사와 건설사들은 일단 초기 계약률을 높이기 위해 이 같은 방법을 마케팅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미계약분 분양권은 주택으로 간주되지 않아 다른 아파트 청약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전문가는 “잔여가구 모집에서 판매가 끝난 단지들은 실수요보단 전매로 차익을 보려는 투자자들이 많은 편”이라며 “입주 시점까지 분양권을 되팔지 못한 이들이 전세로 돌리는 물량이 많이 나오면 일대 전세가격이 크게 흔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형진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