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대중은 이 세계가 탁월한 개인들이 이뤄낸 분투(奮鬪)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복지 혜택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복지를 가능케 하는 개인의 창의성과 정당한 노력의 대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대중은 그들이 추구하는 획일적 평등주의가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각종 시스템을 서서히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대중의 반역》은 스페인 출신인 세계적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5)가 일간지 ‘태양(El Sol)’에 기고한 글을 모아 1930년 단행본으로 엮은 책이다. 현대 대중사회의 속성과 본질을 정확히 꿰뚫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미국의 권위 있는 문예지 ‘애틀랜틱 먼슬리’는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8세기와 19세기를 대변한다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은 20세기를 대변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삶의 국유화’ 부르는 국가개입주의
가세트가 분석한 대중은 ‘특별한 자질이 없는 평균인(平均人)의 집합체’다. 그런 대중이 민주주의 도입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이제는 문명사회를 지배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대중의 반역’이라고 명명했다. 역사의식과 식견이 부족한 대중이 이끄는 정치가 인기영합 정책에 휘둘리는 중우정치(衆愚政治)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오늘날(1930년대) 유럽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대중이 완전한 사회 주도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유럽이 어느 민족과 국가도 겪어보지 못한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그는 익명성에 의존하는 대중이 ‘다수’를 내세워 전방위적으로 힘을 과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중은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투표가 집권 세력의 정당성을 대변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곤 등 개인적인 문제에도 국가가 즉시 개입해 해결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른바 ‘삶의 국유화’다. 이는 문명 발전의 동력인 개인의 창의와 자발적 노력을 말살한다.”
획일적 평등주의는 대중이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라는 게 가세트의 지적이다. 대중은 ‘특정한 기준에 따라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동일시하면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대중)에게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꼴사나운 것이다. 사회의 평균적 기준에 적합하게 자신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만큼 가져야 하고, 남들이 누리는 만큼 누려야 한다. 만약 그 기준에 미달하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눕혀진 사람처럼 길면 잘라야 하고 짧으면 늘려야 한다.” 비대해진 대중 권력과 여기에 영합하는 정치세력이 결부하면 자유주의와 민주질서는 파괴되게 마련이다.
“대중에 영합하는 정치가 더 큰 문제다. 정치인들은 대중에게 아부하고 온갖 좋은 말을 늘어놓는다. 대중은 대개 그런 사람들을 선택한다. 힘이 세진 대중은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때로는 비범함도 단죄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결국 비(非)지성주의를 낳는다. 자기 통제를 상실한 대중은 또 다른 불평등과 억압을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급진 공산주의인 볼셰비즘과 국가 전체주의인 파시즘이 위세를 떨쳤다. 볼셰비즘과 파시즘은 모두 대중을 기반으로 한 폭력적 이념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대중정치가 최악의 중우정치로 전락한 사례들이다.
창의적 소수가 역사 발전 주도
가세트는 ‘선택된 소수’와 ‘대중’이 각자의 정체성을 깨닫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대중정치가 초래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인간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스스로 어려움을 누적시키는 사람들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아무런 부담도 지우지 않는 사람들이다. 활력 있는 공동체는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소수가 주도한다. 대중이 그들의 활동과 역할을 존중하고 그들의 열정에 동참하면 사회는 저절로 진화한다.”
선택된 소수와 대중은 계급적 서열이 아니다. 소명의식 여부와 자질의 우수성에 기반한 것이다. 선택된 소수는 역사와 문명의 발전을 이해하고 시대정신에 맞춰 스스로 의무를 지운다.
선택된 소수와 대중은 서로를 구분 짓는 절대적 경계선도 아니다. “모든 개인의 내면에도 주체적 자아(선택된 소수)와 집단에 대한 의존심(대중)이 혼재해 있다. 개인은 익명성에 함몰되지 말고 사회와 국가를 이끄는 주체세력이 돼야 한다. 이런 냉철함을 바탕으로 선량(選良)을 뽑아야 대의민주주의도 발전한다.”
김태철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