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로봇의 사랑에 대한 질문 '이토록 보통의'

입력 2019-10-10 17:11
수정 2019-10-11 00:09
어린 시절, 공상과학 만화 속 세상인 2020년은 온갖 새로운 것들로 가득한 미래였다. 비록 캡슐 하나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통닭에서 피자까지 수만 가지 요리를 만드는 미래 식량이 나오진 않았지만 4차 산업혁명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인공지능(AI)과 로봇이 인간의 감정도 대체할 수 있을까.

그리 머지않은 미래의 어느 날, 은기는 고통스럽게 잠에서 깨어난다. 우주항공국에서 일하던 연인 제이가 상의도 없이 1년간 우주 파견근무를 가겠다고 말한 날, 말다툼 끝에 집을 뛰쳐나가다 당한 사고의 후유증 때문이다. 모든 꿈을 포기하고 제이는 은기를 돌보고, 몸과 마음의 상처를 극복한 둘은 프랑스 니스 해변의 새벽 별을 보며 다시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너무도 완벽했던 두 사람의 일상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저녁, 로봇 수거반이 제이를 데려간 것이다. 그리고 여행 가방을 든 제이가 문으로 들어선다. 어리둥절해하는 은기에게 그녀는 말한다. “다녀왔어. 저 친구는 내 복제인간이야.” 은기가 사랑한 것은 제이일까, 아니면 그럴싸하게 복제된 환경일까.

신작 뮤지컬 ‘이토록 보통의’는 미래를 배경으로 인간의 감정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을 다룬다. 기술의 발달이 사랑과 우정, 이별과 아픔 같은 사람의 마음을 대신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상황과 묘사가 재치 있는 설정에 담겨 있다. 예상치 못한 반전은 씁쓸하지만 달콤한 뒷맛을 되새김질하게 하는 매력도 잊지 않는다. 최근 국내 무대에 선보인 뮤지컬 작품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초연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원작은 웹툰이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연재돼 누적 조회수 1억 뷰를 넘긴 화제의 작품이다. 사실 요즘은 웹툰이 원작인 콘텐츠의 인기가 대단하다. 영화 ‘신과 함께’가 대표적이다. ‘죄와 벌’ ‘인과 연’ 등 연작 시리즈로 제작된 스크린용 콘텐츠 원작이 주호민 작가의 웹툰이다. 드라마 ‘미생’,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내부자들’ ‘강철비’도 모두 웹툰에서 파생됐다. 무대용 뮤지컬로 재탄생한 ‘신과 함께’와 ‘무한동력’ ‘찌질의 역사’ 그리고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도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가히 웹툰의 OSMU(원소스 멀티유스) 전성시대라 부를 만하다.

원작은 웹툰이지만 그 모습 그대로 무대화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뮤지컬은 ‘익숙하지만 다시 새로워야 하는’ 부가가치 창출공식이 극대화된 완성도를 보여준다. 음악과 설정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시도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진화는 세트다. 웹툰의 공간이 흔한 일상적 공간으로 그려진다면 무대는 상징적이고 미니멀하며 영상을 활용한 세련됨으로 포장돼 있다. 비주얼적인 변화는 웹툰에서보다 두 사람 아니라 세 사람의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효과적인 압축과 생략이 이뤄진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를 쓴 것은 1932년이다. 1980년 버트 브링커호프가 감독을 맡은 TV용 영화는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미래 영화관에서 버추얼 스킨십을 보고 느끼며 당황하고 분노했던 주인공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의 감성은 재현할 수 없다는 작가의 혜안이 큰 공감을 자아냈다. 2019년 대한민국 소극장 무대를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어 반갑다. 가을을 풍성하게 하는 잘 만든 창작 뮤지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