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여당의 ‘정책 시계’가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에 맞춰졌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전기요금 인상, 동남권 신공항 이전 등 표를 깎아먹거나 논란이 될 정책 결정은 모두 내년 4월 이후로 미뤄졌다. 원격의료 등 경제 살리기에 필요한 규제개혁 법안도 연내 입법을 접었다. ‘조국 정국’으로 인한 정치 공백에 이어 정책 입법의 공백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7일 더불어민주당과 정부에 따르면 민주당은 탈원전 정책으로 인한 한국전력의 적자를 보전하기 위한 전기요금 인상을 내년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지난 6월 한전이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를 완화하는 과정에서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년 4월 이후 전기요금 인상을 약속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이날 자유한국당에서 나왔다.
부산·경남(PK)에서 요청한 동남권 신공항 건설은 원점에서 검토하되 대구·경북(TK) 지역의 반발을 고려해 결론을 총선 이후에 내기로 했다. 여당 관계자는 “섣불리 한 곳을 택할 경우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분양가 상한제 유예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여당 의원들의 강력한 반발이 작용했다. 지난달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서울 지역구 의원들과 연 비공개 간담회에서 “재건축·재개발 조합원이 밀집한 지역구는 총선을 포기해야 한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반면 지역 ‘표심’에 도움이 되는 공공기관 지방 이전은 속도를 내기로 했다. 민주당은 공공기관 이전을 위한 연구용역 결과를 내년 초 발표할 예정이다. 고교 무상교육과 구직촉진 수당 등 무상 복지도 앞당겨 추진하기로 했다. 경제계 관계자는 “한시가 급한 국민연금 개혁안은 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치하고 있다”며 “집권 여당의 책임방기가 도를 넘어섰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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票만 보고 달리는 당정열차…반발엔 몸 사리고, 퍼주기 정책 '속도전'
내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여당과 정부의 유권자 눈치보기가 극에 달하고 있다. 대선 공약이어도 ‘표심’을 갉아먹는 정책은 아예 추진하지 않거나 총선 이후로 미루고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책은 속도를 내고 있다. 정책의 적정성이나 실효성을 감안해 시행 시기를 결정하지 않고, 오직 총선 표가 기준이 되다 보니 모든 정책이 포퓰리즘으로 흐른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전기요금 인상도 총선 후에”
한국전력공사의 막대한 적자에도 불구하고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전기요금 인상이 대표적이다. 자유한국당은 7일 정부가 여름철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완화를 위해 내년 총선 이후 전기요금을 인상하기로 한국전력과 이면 합의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곽대훈 자유한국당 의원에 따르면 한전은 여름철 전기요금을 낮춰주는 누진제 완화를 결정할 이사회를 앞둔 지난 6월 18일 산업통상자원부에 “필수 사용량 보장 공제 제도의 합리적 개선 방안 등을 내년 상반기까지 마련하고자 한다”고 협조를 요청했다.
필수 사용량 보장 공제는 전력 사용량이 월 200㎾h 이하 가구를 대상으로 최고 4000원까지 전기요금을 할인해주는 제도다. 이를 폐지하면 여름철 누진제 완화로 한전이 입게 될 손실 3000억원을 보전할 수 있다. 산업부는 이튿날인 19일 한전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곽 의원은 “내년 총선 뒤 전기료 인상을 추진하기 위해 산업부와 한전이 이면 합의를 한 것”이라고 했다.
대구·경북(TK)과 부산·경남(PK) 지역 민심이 갈리는 동남권 신공항도 총선 이후로 결정을 유보했다. 동남권 신공항은 2006년부터 입지를 두고 PK와 TK가 경쟁을 벌이다 논란 끝에 2016년 김해공항 확장, 대구공항 통합 이전으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월 부산에서 ‘동남권 신공항 재검토’를 시사했고, 가덕도 신공항에 힘을 실어주는 PK 지역은 환영했다. 문제는 TK 지역의 반발이었다. 결국 정부·여당은 총선 전에 결론을 내지 않기로 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1일 국정감사에서 “김해공항 확장에 대한 과학적 검증 작업을 곧 시작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부터 논란이 된 문제에 대해 8개월 동안 어떤 움직임도 없었단 얘기다.
“1만 표 이상이 눈앞에 사라지는데…”
분양가 상한제 확대 유예 결정은 지지자와 조합원의 이탈을 최소화한 정략적 판단으로 보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서울의 재개발·재건축 유예 대상은 61개 단지, 6만8000가구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서울 둔촌동 둔촌주공 아파트의 경우 조합원만 5930가구다. 유권자 1만~2만 명 이상과 등지는 셈”이라고 안도했다.
민주당은 정책 발표 전 설문조사 등을 통해 제도 도입의 득실을 분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찬성 비율은 50%를 넘었다. 민주당 핵심 관계자는 “30~40대의 지지가 있어 완전 철회 등을 강구할 상황은 아니었다”며 “조합원 반발을 줄이고, 지지층은 모으는 절충안인 것 같다”고 말했다. 민주당 정책위원회 관계자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강력한 분양가 규제로 주변 시세 60% 수준의 ‘로또 아파트’ 분양이 이어질 것”이라며 “이들을 지지층으로 흡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민연금 개혁은 정부와 정치권이 책임을 전가하며 결정을 미루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여야 중 연금 개혁 얘기를 먼저 꺼내는 진영에서 모든 비판을 뒤집어쓸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공공기관 이전은 속도전
지지층 결집에 도움이 되는 정책은 속도전을 펴고 있다. 민주당은 122개 수도권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 작업을 내년 초 마무리 지을 예정이다. 김현미 국토부 장관도 지난 2일 국정감사에서 “혁신 도시에 대한 성과 평가가 끝나는 내년 3월 이 결과를 보고 공공기관 추가 이전에 대해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신안산선을 비롯한 철도 등 인프라 건설도 내년 총선을 앞두고 착공됐다.
현금성 복지 사업도 속도를 낸다. 고교 무상교육은 시행 시기를 앞당겨 2학기부터 시작했다. 대상 학년도 거꾸로 뒤집어 고교 3학년부터 시행하는 것으로 바꿨는데 야당은 “첫 혜택을 받는 고3 가운데 일부는 내년 4월 총선에서 투표권(만 19세 이상)을 갖는 유권자가 된다는 걸 염두에 둔 선거용 정책”이라고 반발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여당의 구미에 맞는 정책만 편다면 후폭풍이 있을 것”이라며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 규제개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입법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