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악물고 독하게 버틴 케빈 나…"소피아! 아빠 또 우승했어"

입력 2019-10-07 15:33
수정 2020-01-05 00:02
“말 대신 골프로 보여드리는 것이 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재미동포 케빈 나(36)가 우승을 차지한 뒤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한국어로 말했다. 7일(한국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서멀린TPC(파71·7115야드)에서 열린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슈라이너스아동병원오픈(총상금 700만달러)에서다. 그는 최종합계 23언더파 261타를 적어낸 뒤 패트릭 캔틀레이(미국)와 연장전을 치렀다. 18번홀(파4)에서 열린 연장 2차전에서 파를 잡아 보기에 그친 캔틀레이를 제압했다. 케빈 나는 “이를 악물고 이빨을 갈면서 여기까지 왔다. 허위 사실(이 떠도는 와중)에도 응원해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하다”며 울먹였다. 그는 지난 5월 3승을 확정한 뒤에도 한국말로 “응원해주신 팬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하며 울었다.


첫 승 8년, 4승 5개월…빨라진 우승시계

미국 현지에선 한국어로 한 인터뷰 배경을 놓고 물음표 달린 기사를 쏟아낼 정도로 그의 인터뷰는 감정에 북받쳐 있었다. 케빈 나의 소감은 지난 8월 한 국내 종합편성채널에서 하는 부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다가 결혼 전 파혼을 둘러싼 논란으로 하차한 것에 대한 해명으로 풀이된다. 그는 전 약혼자와 관계로 인해 법적 공방까지 벌여야 했다.

케빈 나는 코스 밖에서 각종 악성 댓글과 비난에 맞서 싸워왔다. 날 선 말들은 그의 가족을 향했다. 케빈 나는 2016년 지금의 아내인 지혜씨와 결혼한 뒤 같은 해 딸 소피아를 얻었으나 전 약혼녀의 꼬리표는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하차한 지난 8월은 아들 레오가 태어난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아내 곁을 지키기 위해 PGA투어 플레이오프 2차전 BMW챔피언십을 결장했다. 우승 확정 후 딸을 꼭 끌어안은 케빈 나는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당당하고 떳떳하며 행복하다”고 소리쳤다.

가정에 정착한 케빈 나의 ‘우승 시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2001년 프로로 데뷔하고 2004년 PGA투어 카드를 획득한 그는 첫 우승을 데뷔 8년째인 2011년에서야 거뒀다. 가정을 꾸린 뒤 2018년 밀리터리트리뷰트에서 2승, 10개월 만인 지난 5월 찰스슈와브챌린지에서 3승을 거뒀다. 이어 5개월 만에 통산 4승째를 신고하면서 최근 16개월 만에 3승을 쓸어 담았다.


고비 때마다 그를 살린 ‘쇼트게임’

케빈 나는 한때 3타 차 선두를 달렸다. 가장 큰 위기는 10번홀(파4)에서 나왔다. 말 그대로 ‘아마추어처럼’ 그린 앞뒤를 오락가락했다. 그는 티 샷 실수 후 세 번째 샷을 그린 뒤로 넘겼다. 네 번 만에 그린 위에 공을 올렸으나 3퍼트로 트리플 보기를 범했다. 케빈 나는 이후 버디 3개로 10번홀 실수를 만회하는 듯했으나 16번홀(파5)에서 2온을 시도하다 공을 물에 빠뜨려 보기를 기록, 캔틀레이에게 선두 자리를 내줬다.

쇼트게임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곳은 17번홀(파3)이었다. 이번엔 캔틀레이가 티샷을 그린 왼쪽 해저드에 빠뜨렸다. 케빈 나의 공은 벙커에 떨어졌다. 하지만 케빈 나는 내리막 벙커샷에 이어 불가능해 보였던 약 7m짜리 파 퍼트 세이브에 성공하며 보기에 그친 캔틀레이를 다시 따라잡았다. 18번홀(파4)에선 20m가 넘는 내리막 어프로치를 홀 옆에 바짝 붙여 파를 지켰다. 캔틀레이의 버디 퍼트는 홀 가장자리에서 멈춰 섰다.

18번홀에서 열린 연장 첫 홀에서 케빈 나는 먼저 3m가 조금 넘는 버디 퍼트를 넣은 캔틀레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슷한 거리의 버디 퍼트로 응수하며 승부를 2차전으로 끌고 갔다. 2차전에서 캔틀레이가 3퍼트 보기로 자멸한 사이 케빈 나는 가볍게 파를 낚아채며 우승컵에 입을 맞췄다. 케빈 나는 연장 상황에 대해 “핀만을 생각했다. 핀만 보고 치자고….”라고 말했다. PGA투어에 따르면 케빈 나는 이번 대회에서 퍼팅에 성공한 거리 합계가 약 170m로 PGA투어 최장 기록을 세웠다. 먼 거리 퍼트를 그만큼 자주 성공시켰다는 얘기다. 그는 오는 17일 제주에서 열리는 PGA투어 CJ컵@나인브릿지 대회에 출전한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