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성 촬영감독이 그동안 자신이 만들어온 영화 철학을 전했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4일 부산시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진행된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 주인공 발탁 기자회견에서 "일제시대에 태어나 한국전쟁과 분단, 독재정권을 거쳤다"며 "그런 시대적인 아픔을 영화로 풀어낸 거 같다"면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앞서 부산국제영화제는 정일성 촬영감독의 대표작 '화녀', '사람의 아들', '최후의 증인', '만다라', '만추', '황진이', '본 투 킬' 등 7편을 한국영화회고전으로 선정했다. 한국영화를 대변해 온 동시대의 대표 감독들과 수없이 많은 작업을 해오며 한국영화의 촬영 미학을 이끄는 선구자 역할을 해온 공로를 인정받은 것.
정일성 촬영감독은 한국영화의 역사를 일궈온 장인이자 자신만의 독특한 촬영 세계를 구축한 촬영의 대가다.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조긍하 감독의 '가거라 슬픔이여'(1957)를 통해 촬영감독으로 입문했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에서는 그만의 파격적인 앵글과 색채 미학을 선보이며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구축했으며,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에서는 사계절을 담기 위해 1년 이상 촬영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신궁'(1979)으로 임권택 감독과 처음 조우한 그는 '만다라'(1981)로 정일성 미학의 정점을 찍게 된다. 당시 한국영화에선 만나기 힘든 미장센과 시퀀스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본선에 진출한 첫 한국영화라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후 '서편제'(1993), '취화선'(2002) 등 임권택 감독 대부분의 작품에서 카메라를 잡으며 오랫동안 명콤비로 활약했다.
한편 정일성 감독 회고전은 오는 12일까지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선보여진다.
다음은 정일성 촬영감독의 일문일답
▶ 이 자리에 온 소감부터.
부산국제영화제 날짜를 잡아놓고 주변 지역에 태풍 피해를 많이 입었다. 그럼에도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는게 감사하고, 주변 분들이 피해를 극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도 중요하지만 그 분들의 일상이 빠른 시일 내에 돌아왔으면 한다.
▶ 회고전 주인공이 되고 고민이 많았다고 하더라.
제가 영화를 한 지 10년 쯤 됐을 때 할리우드의 거장들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평생을 영화할 수 있을가까, 참 부럽다'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런데 제가 영화를 한지 60년이 넘었고, 이번에 회고전을 한다고 칭찬도 받았다. 저를 계기로 많은 분들이 회고전을 했으면 한다.
그동안 격변이 많았다. 일제시대 태어나 해방됐고, 해방되자마자 무정부상태가 됐고, 대학 시절엔 학교 문이 거의 닫혔다. 그리고 독재 정권과 민주화 운동을 통해 지금까지 그런 과정을 겪었는데, 그런 경험들이 오히려 영화하는게 도움이 됐다. 긴장 속에 살지 안되면 안되는 시기였기에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영화를 할 것인가에 대한 정신 무장을 했다. 불행했던 근대사가 제가 지금까지 일하는 원동력이다. 시대의 고통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 것이 영화에 많은 도움이 됐다.
▶ 지금까지 가장 울림이 된 작품은 무엇인가.
136편을 찍었는데 그중의 50편 정도는 부끄럽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을 정도다. 대표작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젊을 땐 겁없이 흥행하고 상받은 영화를 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제가 부끄럽게 찍은 50편의 작품이 저에게 교과서처럼 도움을 줬다.
▶ 가장 힘든 시기는 언제였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영화를 찍기 힘들때, 그런 잠복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멋진 영화들이 나온 것들이 자랑스럽다. 신성옥 감독의 작품들, '만추' 같은 영화도 나왔고. '화녀', '하녀' 이런 영화들도 나왔고. 이후 임권택 감독이 나와서 영화를 만들었고. 그건 꼭 제가 하지 않았더라도 꼭 기억해야 하는 작품이 아닐까.
▶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시대의 울림을 준 작품은 뭐라고 생각하나.
해방 이후 1955년부터 일을 배웠고, 1957년에 데뷔를 했다. 일제시대, 해방 이후 6.25, 그리고 지금까지 큰 격변을 겪었다. 일제시대엔 역사적으로 핍박받았지만 '아리랑'과 같은 명작이 탄생했다. 영화를 통해 항거한다는 정신으로 '아리랑'이 탄생했다는 것은 후배들에게 정신무장을 하게하는 원동력이 됐다. 해방 이후엔 처참했다.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맥을 유지하며 한편 한편씩 만들었다. 명작은 아니라도 정신적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줬다.
6.25 이후엔 엄청난 영화적 진화가 진행됐다. 포르노 같은 영화, 중국 아류의 영화로 맥을 유지하고 필름이 사치품으로 분류돼 수입이 안 돼 미군에 가서 필름을 사서 써야했다. 그런 열악함 속에서 영화 역사가 이어져왔다. 이런 것과 비교하면 지금 영화를 하는 영화인들은 행복한 시대, 행복한 기자재를 통해 표현의 자유 속에 영화를 만들고 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의 질이 당연히 더 좋아져야 한다. 더 발전되고 좋은 영화가 나오길 부탁하고 싶다.
▶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았던 적이 있나.
임권택 감독의 '알래스카의 늑대'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이 있었는데 검열 과정에서 '진도의 개'로 바꾸라고 했다더라.(해당 영화는 이후 '왜그랬던가'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그러면서 호스티스 영화, 식모 영화, 저질의 코미디, 중국 아류의 영화를 10여년 동안 지속했다. 그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했다. 그걸 영화를 통해 저항했다. 물론 그 와중에 신기하게 '어떻게 이런게 나왔을까' 이런 작품도 있었다. 이번에 회고전 첫 작품인 '화녀' 같은 거다. 색채의 저항이 아닐까 싶다. 어두운 시대를 더 어둡게 조명하면서 저항한 거다.
▶ 눈여겨 보고 있는 후배 감독이 있다면?
한국영화 100년이 되는 해에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로 칸에서 상을 받은 건 개인적으로 축하하고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가 이 자리에서 이름을 얘기하면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할 거 같다.
요즘 좋은 영화가 계속 나오는 건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저희는 아날로그 시대의 촬영감독이다. 그런데 요즘은 필름을 보지 않는 사람이 디지털로 촬영한다고 하더라. 영화를 배우는 학생들도 필름도 건너뛰고 디지털로 간다고 하고. 그래서 필름을 하는 사람들이 골동품 취급 당하기도 한다. 디지털을 하더라도 아날로그 과정을 완벽하게 이수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을 할 수 없다. 그걸 건너 뛴 작업물은 뭔가 아쉽다. 필름을 했던 사람들은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부분으로 완성된 결과를 설명할 수 있다. 이게 되야 더욱 독창적이고 창의성있게 만들 수 있다. 저는 영화과 출신도, 영화 전공자도 아니지만 현장으로 몸으로 익힌 후 독학으로 영화 이론을 공부했다. 학도들은 이론과 현실에 혼란이 올 수 있다. 그걸 지혜롭게 넘기면 좋은 촬영감독, 영화감독이 되지 않을까.
▶ 오래 작업한 비법이 있다면.
저는 원칙주의자다. 제 나름대로 생각한 원칙이 있다.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리얼리즘은 있는 그대로 찍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안에 꿈이 없다면 뉴스나 기록영화에 멈춘다. 전 리얼리즘 안에 꿈을 담으려 했다. 그게 제가 지금까지 일을 하게된 배경이 아닐까 싶다.
▶ 오랜 시간 영화를 했지만, 더 하고 싶은 게 있나.
어떻게 다 만족하겠나. 하지만 하고 싶은 건 다했다고 본다. 그동안 36명의 감독과 함께 했다. 그 중엔 20편을 넘게 같이 한 감독도 있고, 1편으로 끝난 사이도 있다. 그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영화를 할 수 있던게 아닌가 싶다.
▶임권택 감독과 오래 했다.
제가 직장암에 걸려 쓰러져 있을 때 저를 다시 일으켜준 사람이다. 생명의 은인이다. 30년을 같이했다. 강산이 3번 변했다. 호흡이 잘 맞은 이유는 저보다 몇 살 아래다. 그런데 사회나 역사나 미래를 생각하는 것들이 거의 일치했다. 그래서 편하게 함께 작업할 수 있었다. 너무 오래해서 매너리즘에 빠져 서로에 독이될 수도 있던 시기도 있었다. 그땐 헤어졌다. 그러다가 다시 만나고. 좋은 카메라로 찍고 싶어서 '황진이'를 찍었다가, '장군의 아들'로 다시 만나고. 매너리즘에 빠지면 독창성이 떨어진다. 처음에 만난 것처럼 자신의 세계를 감독과 토론을 통해 영화를 해나가려 했다. 이젠 서로 젊은 연출자, 젊은 촬영감독과 해야하지 않을까. 그래야 서로의 신세계를 구축할 수 있을 거 같다.
▶ 오랫동안 영화를 하면서 느낀 한국 영화의 힘은 뭘까.
다양성같다. 예전엔 영화에 국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글로벌 시대엔 국적이 없어진 거 같다. 미국 영화 아류같은 작품이 나오는 건 걱정되는 부분이다. 요즘 흥행한 작품들 보면 저는 그렇게 찍지 못할거 같다. 촬영 방식이 제가 찍었던 것과 차이가 있다. 제가 찍은 예전 작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는데, 전 아름답게 찍으려 노력한 적이 없다. 아픔을 어떻게 전할까에 초점을 맞췄다. 또 누군가의 아류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 그래서 전 다른 영화를 안봤다. 저도 모르게 모방할까봐, 자존심이 상해서 하지 않았다.
부산=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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