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소멸한다. 법적 요건을 갖춘 법인은 민법 제3조가 부여하는 생존기간에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서 권리능력을 갖는 인격체가 된다. 자연인처럼 탄생과 성장, 성숙기를 거쳐 생을 마감하는 점에서는 법인도 생물이다. 그러면 자연인과 법인, 누가 더 오래 살까? 인간에게는 100세 수명이 예사지만 기업은 다르다.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기업의 평균 수명을 15년 정도로 추정한다. 실제 1955년 포천이 선정한 500대 기업 중 지금까지 생존한 회사는 60개에 불과하다. 장수기업의 정의는 국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오랜 기업의 역사를 지닌 선진국에서는 창업 100년 이상이거나 대를 이어가며 승계된 기업이 해당한다. 한국 정부는 창업 30년 이상이면 장수기업으로 규정한다. 45년 이상이면 ‘명문’장수기업으로 지정되기도 한다. 기업의 수명이 짧기 때문이다.
실제로 100년 장수기업이 일본에는 3만3000개, 미국과 독일에는 각각 1만2000개, 1만 개가 넘고, 200년이 넘는 기업도 수두룩하다. 한국에는 두산(1896) 동화약품(1897) 몽고식품(1905) 광장(1911) 보진재(1912) 성창기업지주(1916) 신한은행(1897) 우리은행(1899)이 전부다. 그나마 4대를 이어오며 국내 인쇄업의 자긍심을 지켜온 보진재가 10년간의 적자 끝에 폐업을 결정했다. 이제 한국의 장수기업은 7개로 줄어든다.
기업의 수명이 줄어드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다.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넷이 연결하는 유통혁명,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융합한 디지털 변혁과 공유경제의 확산 등으로 인한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장수기업의 비결은 무엇일까? 경영학자들은 내외부 환경에 대한 적응, 기업가정신과 안정된 경영승계, 수익성보다 사회적 신용의 중시, 혁신과 끊임없는 변신 등을 생존요건으로 꼽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종종 운명을 결정하기도 한다. 20년 전에는 국내 30대 그룹 중 19개 그룹이 순식간에 해체되거나 소멸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가져온 우발적 환경 때문이었다.
기업의 영속은 기업인의 꿈이다. 경영자는 누구나 업계 지존의 히든챔피언이 되거나 대기업으로 성장하길 소망한다. 일자리와 세금으로 국가 경제에 한몫하는 것은 기업의 자부심이자 존재 이유다. 크고 작은 위기를 이겨내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장수기업들은 업계의 버팀목이고 귀감이다. 그래서 장수기업이 많아야 경제 체질이 강해진다.
기업이 장수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정부 몫이다. 기업의 원활한 승계를 위해 세계 각국은 상속세를 꾸준히 낮추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13개국에는 상속세가 아예 없다. 있더라도 명목 최고세율이 50%를 넘는 국가는 일본,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한국 4개국뿐이다. 상속세율이 가장 높은 일본은 작년부터 신사업승계제도를 시행 중이다. 직계비속에 대해 납세유예 대상 주식 수의 상한을 없애고, 승계 후 5년간 80% 이상의 고용조건을 못 지키더라도 유예되도록 바꿨다.
한국은 정반대다. 가업승계여도 실제 상속세율이 명목세율보다 더 높고, 승계 조건도 까다롭다. 지분으로 승계할 때는 오너 경영에 대한 프리미엄이 더해져 최고 세율이 65%까지 올라간다. 선진국과 달리 대주주의 경영권 방어수단도 마땅치 않다. 더구나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명분으로 대주주로서 의결권까지 행사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돈을 거둬 관리해야 하는 집사가 상장사의 윤리적·법적 문제가 생길 때마다 경영권을 좌지우지하는 해결사로 나선 것이다.
작년 말 포천이 선정한 세계 1위 기업 월마트는 ‘쉰 살’의 중년이다. 월마트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성장발전에 집중하는 동안 1969년생 동갑내기인 삼성전자와 대한항공은 당장 발등의 불이 더 급하다. 그룹의 승계 과정에서 제기된 회계분식 의혹과 상속세 문제를 해결하고 경영권에 대한 사모펀드의 공격도 막아내야 한다. 안팎으로 경영환경이 악화되면서 문을 닫는 사업장이 계속 늘고 있다. 벤처창업과 청년기업 못지않게 장수기업을 늘리는 일에도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