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예약에 늦어 경보 선수처럼 걷는데 누군가 “인상이 좋다”며 말을 건다. 개그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인 ‘도를 아십니까’ 실사판이다. 요즘도 있나 싶어 돌아보니 눈빛이 형형한 중년 여성이 “조상님 은덕으로 자손이 잘되겠네”란다. 무슨 말을 하나 들어보고 싶은 마음을 접고 더 빨리 걸으려니 조금은 아쉽다. 존재의 비존재, 어쩌면 비존재의 존재를 인식하는 흥미로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는 이런 ‘조상님’이 대거 등장한다. 호텔 사장인 장만월(이지은 분)은 깊은 한을 품고 1000년 넘게 생과 사를 멈춘 상태로 존재하는 중간자다. 직원들 역시 수십 년에서 수백 년간 떠돌던 혼령. 찾아오는 손님(한 품은 귀신들)이 진정한 영면에 이르도록 도우며 자신들의 원한도 언젠가 풀 기회를 기다린다. 이들과 인간 세상의 연결고리는 귀신을 보는 인간 지배인 구찬성(여진구 분). 이들의 기상천외한 협업은 타락 사회가 조금은 정화돼 언젠가 위로받으며 영면하리라는 희망과 위안을 준다.
드라마의 백미는 상상의 공간인 호텔 델루나 자체다. 100층이 넘는 화려한 외관부터 초고층 스카이라운지, 발리 해변을 갖다 놓은 듯한 수영장, 미술관 같은 칵테일바, 초대형 놀이공원, 박람회장 같은 주차장, 각 손님(귀신)의 사연에 맞춘 객실까지 상상 그 이상의 이미지를 화려하고 뭉클하게 담아냈다. 산속 초가삼간이나 기와집이 주된 배경이던 ‘전설의 고향’과는 차원이 다르다.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성을 극대화한 역설의 세트다.
KBS 드라마 ‘단 하나의 사랑’에는 천사가 등장한다. 과거 인간이던 시절 자신을 구해준 발레리나 이연서(신혜선 분)를 구원하는 천사 김단(김명수 분)의 일대기가 애절하게 그려진다. 악마 같은 인척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삶의 의지를 놓은 연서는 세상 모두를 순수하게 정면 응시하는 천사 김단을 만나 다시 태어난다. 천사는 인간과 사랑할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서로를 희생하며 악에 맞서는 과정은 한편의 무용극이다.
사상 처음으로 악마가 주인공인 드라마도 있다. tvN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는 악마 류(박성웅 분)와 그에게 영혼을 판 인간 서동찬(정경호 분)이 대립 관계로 나온다. 입신양명을 위해 뭐든 하는 인간들을 경멸하며 영혼 수집에 열을 올리던 악마는 결국 희생양을 자처한 선한 의지에 마음을 돌린다. 전편에 흐르는 통기타 음악과 음유 시인 같은 주인공들의 공연은 천사와 악마의 서사를 악마 입장에서 구체화한 첫 드라마의 품격을 높여준다.
최근 2~3년 동안 귀신이나 혼령이 주제인 드라마가 주목을 끌긴 했으나 ‘도깨비’(2017년) 외에는 대부분 마니아 대상의 호러·스릴러·액션물이었다. 올해처럼 발레 음악 로맨스가 융합된 판타지 가족 드라마가 연속 편성된 것은 이색적이다. 이 드라마들은 거대한 스케일의 세트, 컴퓨터그래픽(CG), 실황 공연 등을 수반해 작품성과 규모, 시청률 측면에서도 수백억원 규모의 대작 드라마를 무색하게 한다.
귀신·유령·악마·천사는 시공을 초월하는 무의식의 존재다. 정확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유령론(hantologie)을 통해 혼돈의 연속인 현대 삶을 정의 그 자체인 유령성으로 위로한다. 드라마 속 귀신·천사·악마가 법 질서를 초월하고 음모와 거짓, 오해 등 막장 요소를 무시하는 발언과 행동으로 위기를 정면 돌파하는 것은 그래서다. 시대적인 소화불량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소화제. 이 드라마들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