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빨간 마후라' 김영환 장군

입력 2019-09-30 17:26
수정 2019-10-01 14:38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 군에는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다. 미국에서 넘겨받은 L-4, 5 연락기 10대와 T-6 훈련기 10대가 전부였다. 북한은 소련제 전투기 60대 등 220여 대를 앞세워 대거 남침했다. 우리 공군은 훈련기에서 수류탄과 폭탄을 던지며 싸워야 했다. ‘맨주먹 투혼’이었다. 당시 공군 대대장이던 김영환 중령도 그랬다.

전투기 도입이 시급했다. 그는 며칠 뒤 긴급 명령을 받고 동료 조종사 9명과 일본으로 날아갔다. 미국 극동공군의 전투기 F-51 무스탕 10대를 인수하기 위해서였다. 마음이 급해 훈련을 1주일 만에 끝낸 뒤 귀환 다음날인 7월 3일 곧바로 출격했다. 이듬해부터는 미군 지휘를 받지 않고 한국 공군 최초의 단독 출격 작전을 벌였다.

이때 조종사들이 착용한 ‘빨간 마후라’는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추락한 아군 조종사의 수색 방안을 논의하다가 눈에 잘 띄는 빨간색을 떠올렸다고 한다. 형수가 치마를 만들려고 둔 빨간 천을 보고 착안했다는 설(說)도 있다. 1차 세계대전 중 빨간색 전투기로 맹활약한 독일 조종사를 흠모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한국 공군의 상징이 된 ‘빨간 마후라’는 신상옥 감독의 영화와 주제곡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공비토벌 때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하고 팔만대장경 등 국보급 문화재를 지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라며 폭격을 기총소사로 대신한 그는 명령불복종으로 처형될 뻔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났다.

휴전 직후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악천후 속에 기체가 추락하는 바람에 34세로 순국했다. 그의 아버지 김준원 육군 준장과 형 김정렬 초대 공군 참모총장보다 훨씬 먼저였다. 그가 F-51 무스탕을 몰고 처음 출격한 1950년 7월 3일은 ‘조종사의 날’로 지정됐다. 오늘(10월 1일) ‘국군의 날’은 공군 창군 70주년 기념일이기도 하다. 전쟁기념관은 그를 ‘10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했다.

공군 창설의 주역이자 한국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였던 ‘하늘의 사나이’. 가난한 조국 영공에 ‘번개’처럼 ‘청춘’을 불사르고 간 그의 호는 ‘창공(蒼空·푸른 하늘)’이다. 그가 F-51로 외롭게 싸웠던 대한민국 하늘을 이제는 F-35 스텔스기 등 최신 전투기 400여 대가 지키고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