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기업에는 큰소리, 노조 앞에선 눈치…이게 '공정경제'인가

입력 2019-09-30 17:20
수정 2019-10-01 00:19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공공기관 직무급제 도입이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한경 보도(9월 30일자 A1, 3면)를 보면 정부·여당이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연공서열식 호봉제 일색인 임금체계를 업무성격과 난이도에 따라 직무급제로 차등화하는, 지극히 당연한 조치가 번번이 막히고 있는 것은 오로지 공기업 노조들의 반대 탓이다. 2년간 연기를 거듭하더니, 직무급제를 ‘강행’도 아니라 ‘권고’하는 내용의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 발간마저 기약없이 또 해를 넘기게 됐다.

정부는 “매뉴얼의 내용 보완이 필요해 의견수렴 중”이라고 해명했지만 궁색하기 짝이 없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내년 총선을 의식해 정부를 압박하고 있어, 공기업 현장에선 직무급제가 사실상 무산됐다고 보는 분위기다. 전 정부에서 도입한 성과연봉제를 폐기하며 대안으로 내놓은 직무급제 취지는 온데간데 없다.

공공기관의 비효율과 방만경영에 대한 ‘최소한의 개혁’조차 막히면 어떤 일이 생길지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336개 공공기관(금융공기업 제외) 부채가 500조원을 넘었고, 호봉제로 유지되는 정규직 채용은 지난해 3만3900명으로 전년 대비 49.8%나 급증했으며, 비정규직 19만5000명이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공공기관의 빚더미와 ‘철밥통 호봉제’ 유지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돌아올 것이다.

노조에 유리하면 ‘적극 도입’, 불리하면 ‘없던 일’로 만드는 사례는 이뿐이 아니다. 60세 정년연장의 보완책으로 어렵사리 도입한 공공기관 임금피크제도 3년 만에 유명무실해질 판이다. 그런데도 청년 일자리 절벽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이 2022년부터 또 정년연장을 검토하겠다는 정부다. 주 52시간 근로제의 부작용을 덜기 위한 탄력근로제 적용기간 연장(3개월→6개월) 입법도 노동계 반대에 막혀 언제 국회를 넘을지 기약조차 없다.

그러면서 노조 폭력에 대해선 눈을 감은 듯하다. 기물을 파손하고, 폭력을 행사해도 유야무야 넘어간다. 그러니 노조가 국회 담장을 넘어뜨리고, 경찰을 패는데 거꾸로 공권력이 노조 눈치를 본다. 이에 반해 기업과 기업인에 대해선 가혹하리만치 탈탈 턴다. 경제 관련 입법안마다 기업활동을 잠재적 범죄로 간주해 과잉처벌 조항을 넣고, 불가피한 경영판단에 대해서도 ‘걸면 걸린다’는 배임죄로 옭아매기 일쑤다. 기업에는 큰소리 치고, 노조 앞에서는 눈치보는 게 정부가 내건 ‘공정경제’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이 이런데도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의 명분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 노조법 개정안은 해고·실업자 노조활동 허용 등 노동계 요구는 반영하면서, 선진국에선 당연한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 직장점거 금지 등 경영계 요구는 철저히 외면했다. 여당 지도부가 전경련에서 기업인들과 간담회를 가진 다음날 노동계에 사과한 것은 노·정(勞政)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사관계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면 어느 쪽으로 기운 것인지 정부는 분명히 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