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의 컬처insight] 젠더 장벽 허무는 문화계

입력 2019-09-27 11:38
수정 2019-09-27 11:42

검은색 슈트에 긴 바지, 그리고 단화. 지난 12일 Mnet 음악 프로그램 ‘퀸덤’에 출연한 걸그룹 AOA의 무대 복장이다. 걸그룹 무대에서 이런 복장을 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이들이 선보인 노래도 신선했다. 걸그룹 마마무의 ‘너나 해’를 개사해 이렇게 불렀다. “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I’m the tree.” ‘꽃’이 아니라 ‘나무’로 스스로를 칭하는 걸그룹의 모습이 파격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2절로 넘어가며 더 놀랄만한 무대가 펼쳐졌다. 무대에 여장을 한 남성 댄서들이 함께 올랐다. 이들은 핫팬츠에 하이힐을 신고 관능적인 ‘보깅 댄스’를 선보였다. 기존의 성 역할이 통째로 바뀐 무대에 객석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방송 직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는 등 네티즌들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화계에서 높고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던 젠더(gender)의 장벽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방송, 공연 등 다양한 장르에서 성 역할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유명인들의 참여가 늘었다는 점에서 더욱 고무적이다. 과거엔 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대부분 젠더 문제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피했다. 그런데 최근엔 적극적으로 나서며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덕분에 대중들에 미치는 파급력도 막강해지고 있다.

지난 7월 종영한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도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배우 임수정, 이다희, 전혜진이 출연한 작품으로 세 커리어 우먼이 국내 양대 포털 사이트를 이끄는 이야기다. 멋지고 당당한 모습, 남성들의 우정보다 더 진한 ‘워맨스(woman+romance)’에 큰 인기를 얻었다. 공연계에서도 최근 2~3년전부터 ‘젠더 프리’ 캐스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한 캐릭터를 남녀 배우가 함께 맡는 방식이다. 공연계 스타들이 총출동한 연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도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열리고 있다. 오는 11월 10일까지 공연되는 이 작품의 주인공 제이드는 원래 남성이다. 그런데 발레리나 김주원과 배우 문유강이 함께 맡았다. 제이드가 사랑한 유진 역시 남성이지만, 소리꾼 이자람을 포함해 배우 박영수, 신성민, 연준석이 번갈아 연기한다.

이런 시도는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대중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하며 호평 받고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나 캐릭터 자체가 바뀌는 것은 별로 없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만 해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원작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성 역할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느낌을 준다. 동일한 캐릭터도 전혀 다르게 비춰질 수 있다.

앞으로 이런 움직임이 확산되면 콘텐츠 생산 주체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여성은 문화 산업에서 오랫동안 주체가 아닌 객체에 머물렀다. 1989년 미국 뉴욕에서 한 포스터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엔 이런 문구가 써 있었다.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 하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근대미술 부문 작품 중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은 5%에 그치는 반면, 미술관에 걸린 누드화의 85%는 여성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비꼰 것이다.

이후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젠더의 장벽은 아직 극히 일부만이 허물어졌을 뿐이다. 하루빨리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나무’가 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