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있는 발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은퇴하는 게 영 내키지 않았어요. 평생을 몸담아온 바이오산업에 뭔가를 남겨야겠다는 각오로 다시 도전에 나섰죠.”
한규범 파이안바이오테크놀로지 대표(58)가 6년 전 두 번째 창업을 한 배경이다. 화상 환자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창업했던 피부재생 바이오기업을 매각한 뒤 은퇴해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볼까도 했지만 어딘가 허전했다. 그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물러나는 게 싫었다”고 했다. 그가 다시 도전장을 던진 분야는 미토콘드리아 기반 신약 개발이다. 바이오업계 경력이 30년이 훌쩍 넘는 그에게도 생소한 분야였다. 그는 “당시 해외에서 조금씩 관심이 생기던 분야였다”며 “세상에 없는 치료제를 꼭 개발해 환자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인생을 건 두 번째 창업
한 대표가 바이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서울대 공업화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당시 사회적 관심이 컸던 유전공학에 끌렸다. 고추와 감자의 이종교배 등이 언론에서 대서특필되고 대기업들이 속속 바이오 산업에 뛰어들던 시절이었다. 그는 “신기술을 배우고 싶어 몇몇 학과 동기들과 유전공학 수업을 듣기 시작한 게 바이오와 인연을 맺은 계기였다”고 했다. 발효 전문가로 유명한 허원 강원대 생물공학과 교수가 당시 한 대표와 유전공학 수업을 함께 들었던 동기다.
한 대표는 직장도 바이오제약 분야를 선택했다. LG화학의 전신인 (주)럭키에 입사한 그는 미생물 생산공정 업무를 맡아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갔다. LG그룹이 미국 유전공학 기술을 배우기 위한 전진기지로 샌프란시스코에 세웠던 럭키바이오텍연구소에서도 1년6개월간 근무하며 견문을 넓혔다. 그는 “단백질을 배양하는 공정개발과 양산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며 “인간성장호르몬 백신 히알루론산 등의 사업화 공정도 개발했다”고 했다.
그러다 2001년 핸슨바이오텍이라는 바이오기업을 세웠다. 세포치료제 시대가 올 것이라는 판단에 동서지간인 손상혁 파이안바이오 최고운영책임자(COO)와 의기투합했다. 화상환자에게 이식할 피부를 배양하는 사업이었다. 회사가 자리를 잡아갈 즈음 차병원 계열사인 차바이오텍에서 인수 제안을 해왔다. 회사 규모를 키워보자는 생각에 인수 제안을 받아들이고 3년 넘게 차바이오텍에서 개발본부장을 지냈다.
그 무렵 미토콘드리아 치료제에 눈을 뜨게 됐다. “우연한 기회에 미토콘드리아가 여러 질환의 원인이라는 연구논문이 해외에서 하나둘 나오면서 새로운 치료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을 알게 됐어요. 창업을 같이 하자는 권유도 받았죠. 때마침 새로운 도전 기회를 탐색하던 중이어서 망설임 없이 재창업의 길로 들어섰어요.”
미토콘드리아에서 가능성을 찾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엔진 역할을 하는 인체 내 소기관이다. 세포의 에너지원인 아데노신삼인산(ATP)을 생산하면서 활성산소를 배출한다. 세포 간 신호전달과 세포 사멸에도 관여한다. 그렇다 보니 미토콘드리아에 이상이 생기면 인체에도 비상등이 켜진다. 활성산소가 과다하게 배출되면 미토콘드리아 DNA가 파괴되고 기능에 이상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에너지 생성과 대사기능이 떨어지고 몸에 질병이 생기게 된다. 뇌신경 눈 심장 간 신장 췌장 위 등에 주로 발병한다. 에너지 소모가 많은 신경세포 간 근육 등에 미토콘드리아가 많이 분포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미토콘드리아가 어떤 경로로 손상을 입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다이옥신, 플라스틱 가소제 등이 몸 속에 들어오면 미토콘드리아 기능이 떨어지고 질환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대표는 “당뇨 등 대사질환도 미토콘드리아와 관련있는 질환이라는 인식이 의료계에 확산되고 있다”며 “미토콘드리아를 잘 연구하면 암 등 다양한 질환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미토콘드리아가 손상되면 노화가 촉진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정상 쥐의 미토콘드리아를 손상시켰더니 2개월 뒤 털이 심하게 빠지고 피부 주름이 늘었다. 이 쥐에 미토콘드리아를 다시 넣었더니 1개월 뒤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갔다. 미토콘드리아를 활용해 노화를 늦추거나 노화 관련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사례다.
특정 세포 타깃 기술 확보
미토콘드리아를 활용한 신약 개발 경쟁이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본격화하고 있다. 스텔스바이오테라퓨틱스 미토텍 등 미국 바이오기업을 비롯해 미토이뮨테라퓨틱스 엘마이토테라퓨틱스 등 국내 바이오벤처들도 도전장을 냈다. 손상된 미토콘드리아를 표적으로 하거나 미토콘드리아 손상을 막는 방식으로 질환을 낫게 하는 치료제 개발에 한창이다.
파이안바이오가 주목받는 것은 남다른 접근법에 있다. 몸속의 손상된 미토콘드리아를 정상적인 미토콘드리아로 대체하는 방식이다. 정상인의 몸에서 추출한 미토콘드리아를 환자의 몸속에 주입해 미토콘드리아의 본래 기능을 정상화하는 방법으로 치료하는 기술을 확보했다. 국내외에 등록 또는 출원한 특허만 10여 건이다. 이 같은 방식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곳은 파이안바이오와 이스라엘 미노비아세라퓨틱스 등 일부에 불과하다. 미노비아세라퓨틱스는 지난 6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희귀질환인 피어슨증후군 치료를 위한 임상 승인을 받았다.
파이안바이오의 또 다른 경쟁력은 미토콘드리아에 특정 항체를 붙여 암세포 등 특정 세포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기술이다. 손상된 미토콘드리아가 있는 세포의 특정 단백질을 찾아내 그 세포 안으로 정상 미토콘드리아가 들어가게 할 수 있다. 한 대표는 “정상 미토콘드리아가 세포 내로 들어가면 기존의 손상된 미토콘드리아는 사멸하게 된다”며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가 정상화되면 질환도 낫게 된다”고 했다.
“내년 본격 임상 시작”
파이안바이오가 개발 중인 신약 후보물질(파이프라인)은 크게 세 갈래다. 첫째는 정상인의 줄기세포에서 추출한 미토콘드리아를 정맥주사해 염증 치료에 쓰는 치료제다. 다발성 근염 치료제인 ‘PN-101’과 염증 치료제인 ‘PN-102’가 이런 방식으로 개발 중인 파이프라인이다.
‘PN-101’은 개발 속도에서 가장 앞서 있다. 서울대병원 류머티스내과 등과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다. 희귀질환인 다발성 근염은 아직 마땅한 치료제가 없다. 몸속 근육에 염증이 생겨 극심한 통증을 겪게 되는 질환이다. 국내 환자는 2000~3000명 선이다. 한 대표는 “근육에 많이 분포하는 미토콘드리아가 손상돼 생긴 염증을 정상 미토콘드리아를 주입해 치료하는 것”이라며 “세 차례에 걸친 동물실험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만큼 내년에 임상 1상 시험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PN-102’도 염증을 적응증으로 한 치료제로 개발 중이다. 서울대병원, 차의과대 등과 공동 개발을 하고 있다. 그는 “염증과 관련된 여러 질환을 겨냥해 연구하고 있다”며 “파이안바이오의 미토콘드리아 기술을 활용해 서울대병원과 차의과대 등에서 임상연구가 이뤄지는 방식으로 협업하고 있다”고 했다.
파이안바이오가 염증 치료제 분야에 특화하는 배경은 따로 있다. 미국 하버드대병원이 근육 혈관 심장 등의 질환 치료 분야에서 다수 특허를 이미 확보하고 있어서다. 그는 “정상 미토콘드리아를 주입해 질환을 치료하는 분야에서는 특허 이슈가 아직 없는 염증 등의 분야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갈래는 세포치료제로 개발하는 방식이다. 이 회사는 면역세포의 하나인 자연살해(NK)세포에 미토콘드리아를 주입해 암세포 공격력을 높인 ‘PN-201’을 개발 중이다. 에너지원이 되는 미토콘드리아를 NK세포에 넣어주면 암세포 공격력이 높아지는 것을 확인했다. 한 대표는 “동물실험에서 NK세포의 단위 셀당 공격능력이 3~5배가량 향상됐다”며 “국내 바이오기업들과 협업해 세포치료제 개발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세 번째는 항체를 붙인 미토콘드리아를 특정 세포 안으로 들여보내 질환을 치료하는 방식이다. 이 회사가 개발 중인 항암 후보물질 ‘PN-301P’가 대표적이다. 신호전달물질 단백질에 문제가 생겨 면역세포의 공격을 받지 않는 암세포에 정상적인 단백질을 붙인 미토콘드리아를 들여보내면 기존 비정상 미토콘드리아가 사멸하고 암이 치료되는 후보물질이다. 문제가 생긴 미토콘드리아는 스스로 사멸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활용했다. 한 대표는 “1차 동물실험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며 “다국적 제약사 등에 기술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3년 뒤 코스닥 상장 추진”
파이안바이오는 대전 본사와 서울 지사, 충북 오송 등 세 곳에 연구실을 두고 있다. 대전 본사 연구소에서는 주요 파이프라인 개발을 전담한다. 서울 연구소는 서울대병원 등에서 진행 중인 동물실험이나 독성실험에 쓸 미토콘드리아 샘플을 만든다. 오송의 첨단의료복합단지에는 실험실을 갖추고 있다. 최근 오송 제2생명과학단지 내에 1600㎡ 규모의 부지를 확보했다. 이곳에 생산시설을 마련할 계획이다.
한 대표는 직원의 성장이 회사의 성장과 맞닿아 있다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 임직원들에게 최고의 인센티브는 각자 맡고 있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도록 회사가 돕는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연구성과 등을 외부에 발표할 때는 해당 직원에게 기회를 준다. 그는 “직원 개개인이 성공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게 회사의 역할”이라고 했다.
이 회사는 직원 15명 중 14명이 연구직이다. 조만간 5명가량의 연구직 인력을 더 뽑을 예정이다. 상장은 3년 뒤께 추진할 계획이다. 한 대표는 “임상 2상에 들어가거나 기술이전이 성사되면 기술특례 상장을 추진할 계획”이라며 “2022년께 코스닥 상장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영태 기자 p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