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를 내려도 돈이 은행 주변에서 맴돌 뿐 생산·투자처로 흘러들지 않는 이른바 ‘돈맥경화’ 현상이 깊어지고 있다는 한경 보도(9월 16일자 A1, 3면)다. 한국은행이 집계한 올 2분기 통화승수(한은이 공급한 돈이 경제현장을 돌면서 창출하는 통화량의 배수)가 15.7로 역대최저치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통화승수는 1년 새 0.4포인트가 낮아질 정도로 하락세가 빠르다. 한은이 경기회복을 돕기 위해 금리인하를 단행해도 정작 시중에는 기대한 만큼 자금이 돌지 않는 ‘돈맥경화’가 뚜렷해진 것이다. 그뿐 아니다. 현금과 현금성 자산을 합친 ‘부동자금’은 983조3875억원으로 사상 최대, 통장잔액 대비 인출금의 비율인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17.3회(6월 기준)로 역대 최저다. 국내총생산(GDP)을 통화량으로 나눈 통화유통속도 역시 0.72(2018년 기준)로 사상 최저다. 시중에 풀린 돈의 상당량이 생산·투자활동을 외면하고 통장에 묶여 있다는 의미다.
‘돈맥경화’가 심화되면 경제학자 케인스가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을 분석한 뒤 명명한 ‘유동성 함정’으로 치닫게 된다. 8월 소비자 물가가 -0.04%로 사상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한 상황과 맞물릴 경우 일본식 장기불황에 진입할 것이란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이주열 한은 총재는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내고 있다.
하지만 재정정책 역시 근본적인 해법이 못 된다는 점을 망각해선 안 된다. 올 상반기에 역대 최고인 65.4%의 예산집행률을 기록하고도 1분기 성장률(전기대비)이 -0.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였던 점이 잘 보여준다. 성장률은 2분기에 1.0%로 높아졌지만 1분기 추락에 따른 기저효과일 뿐 의미있는 반등은 아니다. 오히려 민간부문의 성장기여도가 -0.2%로 추락하며 구축효과가 뚜렷해진 데서 재정만능주의의 허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재정지출이 부족해서 경기가 부진한 것처럼 호도하는 일이 다반사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과감한 재정 지출에 나섰지만 심혈을 기울인 일자리 정책마저 파탄지경인 게 현실이다.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대기업(종업원 300인 이상, 매출 500대 기업)의 33.6%가 하반기 신입사원 채용 감축을 계획 중인 데서 잘 드러난다. 세금을 쏟아부어 노인 일자리를 만든 덕에 8월 취업자수가 급증한 점을 들어 “고용회복세가 뚜렷하다”고 자화자찬한 것과 대조적이다.
재정·통화정책의 허상은 일본 사례를 봐도 분명하다. 일본은 GDP 대비 정부부채비율을 세계 최고인 215%까지 끌어올리는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함께 4년째 마이너스 금리정책을 펴고 있지만 ‘잃어버린 20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보는 주목대상이다. 2017년 집권 직후 법인세율을 35%에서 21%로 끌어내리며 미국의 ‘나홀로 호황’에 기여한 트럼프는 최근 ‘중산층 감세카드’까지 꺼내들었다. 트럼프 대통령도 중앙은행에 금리인하를 거세게 압박하지만 ‘규제 완화’와 ‘경제적 자유 확대’ 조치를 선행했다는 점에서 한국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재정 살포와 금리 인하에 매달리며 갈팡질팡하는 데서 벗어나 일관성 있는 규제 완화로 당장 전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