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 항구에 다다른 세 남자의 고백과 구원

입력 2019-09-16 17:06
수정 2019-09-17 02:56
‘나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중견 작가 이승우의 새 장편소설 <캉탕>(현대문학)에 등장하는 인물 한중수의 독백이다. 이 소설은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세상 끝까지 다다른 세 사람의 삶을 독백과 대화로 풀어낸다. 이를 통해 삶과의 사투를 넘어 궁극적인 구원의 세계를 발견해 가는 여정을 그렸다.

대서양의 이름 모를 항구도시 ‘캉탕’의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자리잡은 세 사람이 등장한다.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머릿속을 울리는 이유 모르는 소음과 진동으로 쓰러진 한중수는 정신과 의사 친구 J의 권유로 캉탕을 향해 떠난다. 그곳에서 핍과 타나엘을 만난다. J의 외사촌인 핍은 어린시절 읽은 소설 <모비딕>에 매료돼 고래를 잡으러 바다를 떠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배가 정박한 캉탕에서 피쿼드란 선술집을 열고 새 삶을 꾸려 나간다. 선술집 건물 3층에 묵고 있는 타나엘은 신앙과 삶의 궤도에서 이탈한 채 실패한 자기 인생을 글로 쓰는 인물이다.

이들을 캉탕으로 이끈 것은 각자에게 들리는 세이렌의 노래였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세이렌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해 배를 좌초시킨 뒤 선원들을 잡아먹는 상상의 존재다. 한중수를 부른 세이렌은 노름쟁이 아버지와 우울증 환자 어머니로 시작된 아픈 과거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핍의 세이렌은 궁핍한 시절, 들뜬 사랑의 목소리를 들으며 새 삶을 꿈꾸게 한 <모비딕>과 아내 나야였다. 타나엘의 세이렌은 선교활동을 위해 떠나온 캉탕에서 오래전 실종 처리된 연인의 죽음이었다.

유령처럼 힘겹게 생을 이어가는 세 사람은 새롭게 주어진 캉탕이란 공간에서 진정한 자신을 회복하고자 그들이 도망쳐온 자신의 과거 속 숨겨진 진짜 자신을 고백한다. 부모를 부정하고 미워한 과거에 대한 한중수의 고백, 세상을 떠난 나야를 인정하지 못하고 곁에 두려했던 핍의 고백, 한 여인을 사랑했지만 죽음에 이르게 한 타나엘의 고백이다. 고백을 통해 세 사람은 자신을 억압했던 과거와 화해하며 뒷걸음질이 아닌 각자의 방식으로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

이지은 문학평론가는 “캉탕이란 공간에서 무한히 걷는 인간을 통해 소설은 ‘죄와 구원’이라는 신학적 주제를 이야기한다”며 “소설 속 그들의 걸음은 삶의 걸음이었으며 자신을 향한 수행이자 신을 향한 기도였음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