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태의 데스크 시각] 구호에 그친 혁신성장

입력 2019-09-15 17:15
수정 2019-09-16 00:28
“헛웃음밖에 안 나옵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4일 발표한 바이오헬스산업 혁신전략추진위원회의 1차 회의 결과에 대해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이런 반응을 내놨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며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 회의에서는 내년부터 2년간 희귀질환자 등 2만 명의 바이오 빅데이터를 구축하는 방안이 확정됐다. 2029년까지 100만 명 규모로 바이오 데이터를 구축하기 위한 1단계 사업이다.

유전체 빅데이터 구축은 맞춤형 의료의 출발점이다. 개개인의 유전적 특성을 살펴 맞춤형 의약품을 처방할 수 있게 된다. 개인정보보호법과 의료법 등 제도적 걸림돌에 막혔던 유전체 빅데이터 구축에 물꼬가 트였으니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산업계의 반응은 차갑다. ‘또 말로만 그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가득하다. 남들은 멀찌감치 앞서 달려가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생색내기에만 급급하다는 것이다.

정책 불신 깊어지는 바이오업계

영국은 이미 10만 명의 유전체 빅데이터를 확보했고 50만 명의 빅데이터 구축 작업도 진행 중이다. 미국은 100만 명의 유전체 빅데이터를 쌓는 ‘올 오브 어스 프로젝트’를 2024년 마칠 계획이다. 이렇다 보니 업계는 2021년까지 2만 명의 빅데이터를 모으겠다는 정부 계획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다.

바이오헬스업계의 정부 불신은 뿌리가 깊다. 의사, 약사 등 기득권 세력과 의료 산업화에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동의하지 않는 정책에는 손을 놓고 있다는 의심을 감추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혁신성장을 기치로 내걸고 바이오헬스 육성을 외치지만 제도 개선 노력은 뒷전이라는 지적이다.

소비자 의뢰 유전자검사(DTC)가 대표적이다. 해외에선 유전자검사를 통해 특정 질환의 발병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탈모 등 미용 관련 12개 항목을 제외하면 엄격히 제한돼 있다. 의료계 시민단체 등의 반대에 막혀서다.

의료계의 반대 논리는 과잉 진료를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암 발병 가능성이 높다는 유전자검사 결과를 받아든 사람은 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진료를 받게 되고 그만큼 의료비 부담도 커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기득권 눈치만 보는 정부

하지만 산업계의 목소리는 다르다. 식이요법과 금연 등 예방 조치를 통해 발병을 막거나 늦추면 사회적 비용이 훨씬 줄어들 것이라고 설명한다. 일각에서는 의료계의 반대가 밥그릇을 뺏기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DTC 업체들이 질환 검사까지 하면 병의원에만 허용된 유전체분석 서비스가 타격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정부의 의지다. 과거의 틀에 갇힌 채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으려 해서는 한통속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복지부는 올초 DTC 허용 범위를 57개로 늘리기 위한 시범사업에 들어갔지만 참여기업만 선정하고 여태껏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공용기관생명윤리위원회가 13개 참여기업이 제출한 연구계획서를 하나도 통과시켜주지 않고 있어서다. 규제 샌드박스도 마찬가지다. 마크로젠 등 4개 유전체 업체가 참여하기로 했지만 석 달이 넘도록 공용기관생명윤리위가 승인을 미루고 있다.

사업 승인권을 가진 공용기관생명윤리위는 DTC 확대 등을 반대해온 의료계 시민단체 종교계 등의 인사로 구성돼 있다. 복지부 등 담당부처는 나설 기미가 없다. 이러니 유전체 규제완화가 10년 넘게 헛바퀴 돌고 있는 원격의료 꼴 날까 두렵다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래서는 혁신이 없다.

p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