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40년 전 그 시대를 비판적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쓰다 보니 지금의 시대가 잘못돼 있다면 당시 시스템에 수긍하고 안주해왔던 제게도 책임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소설가 은희경(60)은 지난 6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7년 만에 펴낸 신작 장편소설 <빛의 과거>에 대해 “지금의 현실을 만든 기성세대의 반성문”이라고 말했다.
소설은 오랜 시간 함께했다고 여긴 친구 희진이 어느 날 소설가가 돼 주인공 유경의 눈앞에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유경은 희진이 쓴 소설을 읽으면서 40년 전 대학 시절 기숙사 생활로 돌아간다. 당시 희진의 눈에 비친 유경에 대한 평가는 이랬다. ‘회피야말로 가장 비겁한 악이다. 애매함과 유보와 방관은 전 세계 소통에 폐를 끼친다.’
이 구절은 젊은 시절 작가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여성 비하라는 젠더 문제나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등 여러 문제를 과거엔 냉소라는 이름으로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태도로 봤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모두 현실에 대한 회피이자 세계를 적극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은 데 대한 자기방어적 태도였습니다.”
예순 살인 2017년 시점에서 스무 살이었던 1977년을 회상하는 유경은 과거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희진이 쓴 소설 속 자기 모습이 전혀 다른 것에 충격을 받는다.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적당히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미화하고 편집하는 점을 꼬집는 대목이다. “내가 가진 과거 기억은 나를 좋게 생각하고, 내 위주로 이야기를 짜며, 나에게 좋은 역할을 맡깁니다. 하지만 ‘진짜 남의 눈에도 이럴까?’ ‘객관적으로 난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 보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을 남의 시선으로도 읽을 수 있어야 진정 내 좌표를 읽는 거죠.”
<빛의 과거>는 작가의 ‘자기 독백’ 같은 느낌을 준다. 소설은 작가가 1977년 숙명여대 국문과에 입학한 뒤 3년을 보냈던 기숙사 경험에서 출발했다. 작가가 대학 학보사에서 일했던 기억도 유경에게 투영했고, 그가 20대 시절 직접 겪은 독재 정권의 암울한 시대의 모습도 소설 속에 그대로 반영됐다. 작가는 대학 1학년 당시 썼던 일기장과 학보사 시절 취재수첩, 학보사 특집 지면 등을 다시 들춰보며 기록을 재생했다고 했다. 그 속에서 뽕밭이었던 잠실 풍경이나 음악감상실, 다방, 휴대폰 없이 기숙사 전화기 두 대로 소식을 기다려야 했던 청춘들의 모습을 찾아냈다.
“비록 풍물은 다르지만 모두 뭔가 되고 싶고, 미래에 대해 막막하고, 가슴 떨리는 첫사랑을 꿈꿨던 모습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40년 전에도 페미니즘 강좌가 있었고 저처럼 교육받은 기득권 여성들은 문제의식을 가졌죠. 하지만 결국 기존 시스템에 안주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젊은 여성들이 싸우고 있는 거죠. 가슴이 아픕니다.”
작가는 소설 속 유경과 희진 둘 다 “나의 페르소나”라고 했다. 그는 “소심하고 어정쩡한 온건함에 익숙했던 20대 대학생 시절 자아는 유경에게, 30대에 소설가가 된 이후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스타일은 희진에게 있다”고 설명했다.
소설은 출신지와 자라온 배경이 다른 20대 초반 여대생들이 기숙사라는 공동체 공간에서 만나 ‘뒤섞여’ 살며 서로 ‘다름’을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래서인지 유독 ‘다름’과 ‘섞임’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정보에 의해 타인을 규정짓는 지금,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서로의 다름이나 함께 섞임을 느끼며 인간을 이해했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의 개성과 그들의 다양한 욕망을 바라보는 시선, 40년 세월 동안 그들이 예상치 못했던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 타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으면 했습니다.”
글=은정진/사진=허문찬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