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백화점은 지난달 26일부터 추석 선물세트를 본격적으로 판매했다. 이 백화점이 ‘5스타’로 부르는 프리미엄 선물세트는 판매 시작 1주일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명품 한우 스페셜’(200만원) 등 고가 한우세트는 ‘없어서 못 팔’ 정도다. 롯데백화점에서는 200만원짜리 ‘영광 법성포 황제 굴비세트’가 대부분 팔려나갔다.
국내 주요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 추석 선물세트 판매가 늘고 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등 경기는 좋지 않지만 선물 시장은 매년 성장하고 있다. 반면 추석 준비를 위해 전통시장을 찾는 발길은 뚝 끊겼다.
6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롯데 현대 신세계 갤러리아 등 국내 매출 상위 4대 백화점의 올 추석 선물세트 판매 평균 증가율은 10.6%에 달했다. 대형마트도 괜찮다. 이마트는 선물 사전예약 판매를 시작한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4일까지 관련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4.7% 늘었다. 회사 관계자는 “2만~5만원 선물세트 판매가 작년 대비 세 배 증가했다”고 전했다.
전통시장은 분위기가 반대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는 추석 준비를 위해 나온 사람을 만나기 힘들 정도다. 남대문시장에서 아동복을 판매하는 한 상인은 “작년 추석에 비하면 반의반도 안 나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가게에는 추석명절 판매용 아동복이 팔리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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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세트 불티 백화점 '樂소리' 손님 뚝 끊긴 전통시장 '惡소리'
롯데백화점 식품 바이어들은 올초 달력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대목인 추석이 너무 일러 선물세트가 잘 팔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여름 휴가철과 추석이 가까우면 소비 여력이 떨어진다는 게 유통업계 ‘속설’이기 때문이다. 경기까지 좋지 않아 여름 내내 걱정은 더 커졌다.
하지만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롯데백화점 추석 선물세트 판매는 작년보다 늘었다. 신세계·현대백화점도 마찬가지였다.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으면 선물시장은 계속 성장한다’는 또 다른 통념이 경기와 속설을 넘어선 셈이다. 하지만 경기침체의 여파는 전통시장을 덮쳤다. 추석을 1주일 앞두고 다녀온 서울 남대문시장, 경기 광명시장은 썰렁했다. 상인들은 모두 “추석 경기를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매우 비싸거나 저렴하거나
과거 추석 선물 판매 규모는 경기의 ‘바로미터’로 불렸다. 하지만 이 공식도 폐기해야 할 듯하다. 요즘은 경제상황과 배치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경기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백화점·마트의 선물 판매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곶감과 굴비는 상징적인 상품이다. 명절에만 ‘반짝’ 많이 팔린다. 특히 굴비는 최근 가격이 급등해 “선물 아니면 사실상 수요가 없는 셈”이라고 유통업계 사람들은 말한다. 이 곶감과 굴비가 올 추석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롯데백화점이 지난 4일까지 팔린 선물세트를 판매 증가율 순으로 집계했더니 곶감이 27.2%로 가장 높았다. 그다음이 굴비였다. 25.9% 늘었다. 곶감과 굴비는 이 백화점의 선물세트 전체 매출 증가율을 세 배가량 웃돌았다.
잘나가는 선물시장에서도 양극화는 나타나고 있다. 수요가 고가 상품과 초저가 상품에 집중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의 가격대별 매출 증가율을 보면, 30만원 초과 선물세트가 15%로 가장 높았다. 신세계백화점이 올 추석을 앞두고 전시용(?)으로 내놓은 2500만원짜리 47년산 ‘글렌피딕 1961’은 나오자마자 누군가가 사갔다. 롯데백화점에서도 2000만원짜리 와인세트 두 개 중 하나가 판매됐다.
마트에선 저렴한 상품이 인기다. 홈플러스가 샴푸, 비누, 칫솔 등을 담아 내놓은 1만~2만원대 저렴한 ‘위생 세트’는 예약판매에서 전년 대비 85%나 더 팔렸다. 이마트에서도 9800원 와인 등 초저가 상품 위주로 판매가 잘 되고 있다.
“소득 수준 높아지자 선물도 많이 해”
불황에도 선물 판매가 늘어나는 이유에 대해 최명화 서강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로 접어들면서 선물이 특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큰 부담 없이 주고받는 게 트렌드가 됐다”고 말했다. 이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롯데백화점에서 과거 선물의 70% 정도를 법인이 구매했지만 요즘은 그 비중이 절반 정도로 떨어졌다. 개인 비중이 늘었다. 롯데 관계자는 “과거 부모, 형제 등 가족 중심으로 명절에 선물했던 관행을 친구와 직장 동료 등 지인으로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으로 지난 3년간 꽁꽁 얼어붙었던 선물 소비심리가 완화된 영향도 있다. ‘안 주고 안 받는’ 분위기에서 요즘은 ‘성의는 표시하자’는 사람과 기업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전통시장 명절대목’은 옛말
전통시장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과거 서민들이 추석을 준비했던 대표적 전통시장인 남대문시장을 찾았다. 추석 대목 느낌은 전혀 없었다. 궂은 날씨 탓에 시장에 나온 사람은 더 없어 보였다. 비가 오지 않을 때 남대문시장을 오가는 이의 상당수가 외국인이었다. 삼익패션타운에서 아동복 매장을 운영하는 오모씨(47)는 “경기가 안 좋다고는 하지만 작년 추석과 비교해 매출이 반의반도 안 나온다”고 토로했다. 그는 “과거 명절이면 조카와 친척 아이들 선물을 사러 오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으로 사기 때문에 명절 손님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명절 때 수요가 집중됐던 한복집도 어려워지기는 마찬가지다. 남대문에서 한복집을 운영하는 이모씨(53)는 “올 설 연휴 때보다 손님이 더 없다”며 “명절이 되면 어린이집 행사용 단체 주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뜸하다”고 말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명절을 앞두고 발 디딜 틈 없었던 남대문시장. 불황과 소비 트렌드 변화 속에 옛 명성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서민이 주로 찾는 전통시장은 소비침체 영향을 크게 받는 데 비해 중산층이 많은 백화점과 마트는 소비 경기보다 트렌드에 더 영향을 받는다”며 “고가 선물은 백화점에서 구입하고, 저렴한 선물은 마트 또는 온라인에서 구매하는 식의 패턴이 더욱 고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안재광/박종필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