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빵공장 기관실 직원, 노동운동가, 국회의원 보좌관, 대학 교수, 공기업 사장…. 황창화 한국지역난방공사 사장(60·사진)은 종잡을 수 없는 이력의 소유자다. 황 사장은 “인생을 지름길로 살지 못하고 많이 돌아서 왔다”며 “국회도서관장을 지내 인문학도 출신일 것이라 오해받지만 에너지 관련 자격증만 3개를 보유하고 있는 전형적인 ‘공돌이’”라며 웃었다.
지난 2일 어스름이 깔릴 무렵 경기 성남시 분당의 율동공원 인근에 자리잡은 안동국시 전문점 ‘고타야’에 황 사장이 들어섰다. 다음달이면 취임 1년을 맞는 그의 표정이 밝았다.
중학생 때부터 홀로 서울살이
고타야는 언뜻 일식집으로 착각할 법한 이름이다. 황 사장은 “신라시대 안동 지역을 일컫던 이름”이라며 “제 고향인 경북 예천과 안동이 가까워 ‘고향의 맛’이 그리울 때마다 찾는 집”이라고 소개했다. 대표 메뉴인 ‘고타야정식’을 주문하자 밑반찬과 함께 한우 양지고기를 담백하게 삶아낸 수육이 상에 차려졌다. 그는 “여기 음식은 자극적이지 않아 소화도 잘돼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 권하는 대로 수육에 깻잎절임을 곁들이니 깻잎향이 입맛을 돋웠다.
황 사장에게 고향이 애틋한 까닭은 ‘서울 유학’이 워낙 빨랐던 데 있었다. 그는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 할머니 손을 잡고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며 “부모님은 시골에서 학비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고 했다.
인생의 큰 변화는 갑자기 찾아왔다. 중학교 입학식 직전 할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 병세가 깊어지자 부모님이 시골로 모시고 내려갔는데, 한 달 만에 돌아가셨어요. 당시 ‘서울에서 혼자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빨리 회복하셔서 다시 봬요’라고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가 장례식 때에야 도착했다고 해요.” 황 사장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황 사장은 친척집과 하숙집을 전전하며 홀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제빵공장 기관실에서 일한 ‘기술자’
중·고등학교 시절을 물으니 “한마디로 ‘범생이’였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가 졸업한 서울 동성고는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는 학교로, 선도부가 없었을 만큼 학생 자율성을 존중했다. 당시 이사장이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황 사장은 “교내 규율이 엄격하지 않아 인근 계성여고와 진명여고, 정신여고생 등과 같이 동아리 활동을 꽤 많이 했다”며 웃었다. 동아리는 주로 독서 모임이었다. “대학로 가톨릭회관에 모여 책을 읽고 소소한 감상을 나누곤 했어요. 이청준, 김승옥, 황석영 같은 현대문학을 많이 읽었죠.” 한때 작가를 꿈꿨던 그는 연세대에 진학한 뒤 학보 ‘연세춘추’에 시를 싣기도 했다.
막상 대학에 입학(77학번)하고선 수업에 열중할 수 없었다. ‘취직은 잘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선택한 토목공학과 강의보다 사회 문제에 더 마음이 갔기 때문이다. 황 사장은 “고등학교 수업과 별다를 게 없어 실망하던 차에 선배에게서 공부 모임을 하나 소개받았다”며 “소위 운동권 서클이었는데 그때부터 사회참여 활동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마침 막걸리가 나왔다. 메밀묵을 미나리, 김, 김치와 버무리니 안주로 제격이었다. 황 사장은 막걸리를 들이켠 뒤 얘기를 이어갔다. 야학에서 근로자들을 가르치던 그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노동 현장부터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로선 꽤 큰 기업이던 경기 성남 샤니 공장에 ‘위장취업’했다. 이 사실이 드러나 해고될 때까지 약 4년간 노조 간부로 활동했다. 기관실에서 일하면서 열관리, 냉동, 고압가스 등의 기술자격증도 취득했다.
황 사장은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면 ‘내게 인생의 나침반과 같은 멘토가 있었다면…’ 하는 순간이 많다”며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하다 보니 주변에 조언을 구할 사람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인생에 후회는 없지만 ‘먼 길을 돌아서 왔다’고 생각하게 된 배경이다. 이 때문에 청년들을 만날 때마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되, 중심을 잃지 말라”는 조언을 건넨다.
황 사장은 “마흔 살이 넘어서야 국회 보좌관이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게 됐다”며 “노동운동을 하면서 딴 기술자격증이 지역난방공사 사장직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듯, 돌이켜보면 젊을 때의 모든 일이 다 자양분이더라”고 덧붙였다.
백석역 사고 땐 밤새 현장 지켜
“젊었을 때 노동운동의 현장을 끝까지 지켰지만 생계유지는 당면한 현실 아닙니까. 먹고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이 식당 근처인 분당 이매촌만 해도 돈을 벌려고 매일 새벽 우유를 배달하던 지역이에요.” 황 사장이 빈 막걸리잔을 다시 채웠다. 그 사이에 대표 메뉴인 안동국시가 들어왔다. 황 사장은 “담백한 이 맛을 좋아해 국회에서 일할 때도 여의도 안동국시집을 자주 찾았다”고 했다.
황 사장은 1998년 임채정 전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취업했다. 임 의원은 당시 건설교통위원회 소속이었다.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게 큰 도움이 됐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동기생들을 만나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듣고 의정에 반영할 수 있었다. 임 의원이 건교위 국정감사 때 최우수 의원으로 꼽히는 데 공헌했다.
정부로 자리를 옮겨 국무총리비서실 정무2비서관, 정무수석비서관 등을 지냈다. ‘소통과 합의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했다. 황 사장은 “상장회사인 지역난방공사는 시장형 공기업이어서 태생적으로 시장의 요구와 공익적 가치를 조율해야 한다”며 “여러 갈등 상황이 많은데 결국 사회적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지역난방공사의 대표적 갈등 상황은 전남 나주시의 고형폐기물(SRF) 열병합발전소를 놓고 빚어지고 있다. 2017년 12월 발전소를 준공했지만 ‘유해 시설’로 낙인찍은 지역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재무제표에 2414억원의 발전소 손상차손을 반영했다. 꾸준히 흑자를 내던 우량 공기업을 2265억원의 적자로 돌아서게 한 결정타였다. 황 사장은 “주민투표 방식 등 일부 사안에 주민과 합의를 봤다”며 “주민의 막연한 불안이 해소될 수 있도록 대기질 영향 등 객관화된 자료를 모두 공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주민들과 진정성 있게 끝까지 대화하겠다”고 강조했다.
작년 말 경기 고양시에서 일어난 온수관 파열 사고 때 50여 명의 피해자를 가장 먼저 만난 사람도 황 사장이었다. 당시 사고는 백석역 인근 도로에서 노후 온수관이 터지면서 발생했다. 길 한복판에서 뜨거운 물기둥이 치솟으면서 다수의 사상자가 생겼다. 지역난방공사 역사상 최악의 위기였다. 그는 “작년 10월 취임 이후 전국 지사를 돌면서 업무보고를 끝낸 다음날 갑자기 사고 소식을 듣게 됐다”며 “현장이 어지러우니 사고 수습 이후 방문하라는 직원들의 조언이 있었지만 그냥 한밤중에 찾아갔다”고 했다.
밤새 인근 병원을 돌면서 부상자들을 만났다. 면담조차 거부했던 사망자 유족도 차츰 마음의 문을 열었다. 황 사장은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황망할까 싶어 피해자들을 만나 고개를 숙였다”며 “한숨도 못 잤지만 조금의 위로라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역난방공사는 이후 황 사장의 진두지휘 아래 7~8개월에 걸쳐 전국 노후 수송관의 보강작업을 끝냈다.
“신북방정책·남북경협 핵심은 에너지”
황 사장은 취임 때부터 결심한 목표가 있다고 했다. “이제 국내 시장은 포화 상태입니다. 해외에서 새로운 비전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지역난방공사가 확보하고 있는 선진적인 난방시스템을 수출하려는 노력도 그래서 나왔다. 이 회사는 최근 몽골 정부와 ‘몽골 10개 아이막(지방도시) 지역난방시스템 개선 컨설팅사업’에 들어갔다. 지난달 수도 울란바토르에서는 현장사무소 현판식을 열었다. 이번 사업은 몽골 정부의 최대 국책사업 중 하나다. 몽골 21개 지방도시 중 10곳의 노후화된 지역난방설비를 교체하는 게 골자다. 컨설팅비만 108억원 규모다.
황 사장은 “추운 지역에 있는 신북방 국가들은 지역난방공사의 중요한 잠재 시장”이라며 “이제는 우리가 ‘난방 한류’를 불러일으키겠다”고 자신했다. 그는 “향후 남북한 경제협력을 본격 추진할 때에 대비해 회사 차원에서 북한 경제를 연구하고 있다”며 “북한이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게 에너지인 만큼 이 분야에서도 지역난방공사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집단에너지 시장 50% 점유…종합 에너지기업 발돋움
1985년 11월 설립된 한국지역난방공사는 전국 19개 사업소에서 열병합발전소 운영 등 집단에너지 사업을 하는 공기업이다. 공동주택 160만 가구, 상업건물 2498개의 난방을 책임지고 있다. 집단에너지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국내 최대 사업자다. 직원 수는 2083명이다.
지역난방은 ‘규모의 경제’를 이용한 선진화된 난방시스템이다. 각 가구가 개별난방을 하는 대신 열병합발전소에서 대량 생산한 온수와 열을 공동주택 등에 공급하는 방식이다. 열병합발전소는 물을 가열할 때 생긴 증기로 터빈을 돌려 열과 전력을 동시 생산하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이 높다. 지역난방공사는 난방을 비롯해 냉방, 전기, 신재생에너지 등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황창화 한국지역난방공사 사장 약력
△1959년 경북 예천 출생
△1977년 동성고 졸업
△1983년 연세대 토목공학과 졸업
△1998~2004년 임채정 국회의원 보좌관
△2002~2003년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전문위원
△2004~2006년 국무총리비서실 정무2비서관
△2006~2007년 국무총리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
△2008~2011년 대구대 사회교육학부 객원교수
△2012~2014년 국회도서관 관장
△2018년 10월~ 한국지역난방공사 사장
■황창화 사장의 단골집 고타야
한우 살코기만으로 우려낸 칼국수 육수 '깔끔'
경기 분당 율동공원 옆에 자리잡은 안동국시 전문점이다. ‘고타야’는 신라시대 경북 안동지역을 부르던 옛 이름이다. 문경 출신 임광빈 사장(64)과 아들 임현종 씨(36)가 10년째 운영 중이다.
안동식 칼국수인 안동국시가 대표 메뉴다. 육수를 살코기만으로 우려내 깔끔한 맛이 특징이다. 가늘게 찢은 양지고기 고명은 한우만 고집한다.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 일품이다.
강원 봉평에서 가져온 메밀묵을 미나리, 김, 김치와 함께 버무린 메뉴도 인기다. 시원한 막걸리와 곁들이면 맛이 배가된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배추김치, 부추김치, 깻잎절임 재료는 모두 국내산이다. 가게에서 직접 담근다. 날이 추워지면 뜨끈한 국밥을 찾는 손님이 줄을 잇는다. 토란줄기, 콩나물, 무, 대파 등 각종 야채와 한우 양지고기를 푹 고아낸 국물에 태양초로 매콤한 맛을 더했다. 포항 참문어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낸 문어숙회도 별미다.
황토로 벽을 바른 소담한 가게 건물은 정갈한 음식 맛과 닮아 있다. 분당저수지를 감싸고 있는 율동공원 바로 옆에 있어 식사 후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다. 한국지역난방공사, 전자부품연구원 등 성남지역 공공기관 직원들 사이에서 맛집으로 유명하다.
구은서/조재길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