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띄어쓰기가 중요한 이유

입력 2019-09-09 09:00
한때 수원~광명 고속도로상에 야릇한 이름의 표지판이 등장해 화젯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동시흥분기점’이 그것이다. “동시흥분기점까지 6㎞ 남았다네…. 근데 이 이상한 이름은 뭐지?” 2016년 개통한 이후 운전자들에게 ‘엉뚱한 상상력’을 자극하던 이 명칭은 2017년 말께 ‘동시흥 분기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띄어쓰기로 엉뚱한 상상력 유발을 차단한 것이다.

‘열쇠 받는 곳’이라 하면 금세 알아

예전에 ‘키불출장소’란 말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쓰인다. 이 말도 사연을 알고 나면 “아하! 그렇구나” 하겠지만 모르고서는 희한한 말일 뿐이다. “키불 출장소? 그런 데도 있나?” 사람들은 낯선 말을 받아들일 때 대개 자신에게 익숙한 단어 단위로 인식한다. 동시흥분기점은 ‘동시 흥분 기점’으로, 키불출장소는 ‘키불 출장소’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 언어 인식체계가 그렇게 구조화돼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소통’에 실패한 사례다.

한편으론 우리말 육성과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띄어쓰기의 중요성이고, 다른 하나는 쉬운 말로 쓰기다. 우선 띄어쓰기를 하면 조금 나아진다. ‘동시흥 분기점’이라 하면 아쉬운 대로 의미 전달이 훨씬 잘 된다.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몸에 익어 알기 쉬운 순우리말로 풀어쓰는 것이다.

분기점(分岐點)은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다. 영어 약자 ‘JC(junction)’를 다듬었다. 고속도로와 다른 고속도로를 연결해주는, 고속도로를 갈아타는 교차로를 말한다. 전에 ‘동시흥JC’라고 하던 것을 그나마 우리말로 순화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미 전달이 쉽지 않다. 순우리말로 ‘갈림목’이라 하면 훨씬 낫다. ‘갈림길’ 또는 ‘갈랫길’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여기에 띄어쓰기를 해 ‘동시흥 갈림목’이라 하면 누구나 금세 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갈랫길’이란 올림말이 없다. 국립국어원에서 운영하는 개방형 사전 <우리말샘>에 ‘갈래길’이 제시돼 있는데, 이는 ‘갈림길’의 북한어로 처리돼 있다.

공급자 언어에서 수용자 언어로

‘키불출장소’는 더 고약한 말이다. 풀면 ‘키(key)불출(拂出)장소(場所)’다. 새로 지은 아파트가 입주할 즈음에 각 가구에 집 열쇠를 나눠 주는 곳이다. 이 말은 ‘키 불출 장소’로 띄어 써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불출은 ‘돈이나 물품을 내어줌’이란 뜻인데 일상에서 거의 쓰지 않는 낯선 말이다. 한글학회에서는 일본말로 규정(<우리말 큰사전>, 1992년)해 ‘지급’으로 바꿔 쓰게 했으나 <표준국어대사전>(1999년)에선 어원 정보 없이 이 말을 살려 놨다. 영어 ‘키(key)’에 정체가 모호한 ‘불출’을 조합해 ‘키불출’이라 하니 알아보기 힘들다.

더구나 ‘불출’은 내어 주다, 즉 공급자 관점의 말이라 온당한 표현이 아니다. 수용자 관점의 말, 즉 아파트 입주자가 주체가 돼야 옳다. 그렇다면 열쇠를 찾거나 받아가는 곳이다. ‘열쇠 받는 곳’이라 하면 충분하다. 누가 봐도 의미를 쉽게 알 수 있다. 어려울 게 없는데 고쳐지지 않는 까닭은 무관심 탓이다. 습관의 힘은 무섭다. 무심코 써오던 말이라 별 생각 없이 쓴다.

우리말 발전의 길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생활 속에서 작은 것부터 실천하면 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무겁고 거창한 단어, 현학적 표현을 찾기보다 독자의 관점에서 말하듯이 풀어쓰는 게 요체다. 굳이 안 써도 되는 외래어를 써서 글의 흐름을 망칠 이유도 없다. 그것이 ‘읽기 쉽고 알기 쉽게 쓰기’의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