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조각의 변주…캔버스 밖으로 나온 회화

입력 2019-09-05 17:25
수정 2019-09-06 00:26

독일 추상화의 거장 이미 크뇌벨(79)은 젊은 시절 러시아 절대주의 추상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에게 푹 빠졌다. 예술을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인식한 말레비치의 회화론이 마음에 와닿았다. 1965년 뒤셀도르프 국립미술학교에서 백남준의 ‘예술적 친구’인 요셉 보이스에게 미술을 배운 그는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내겐 회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작품 제작 과정과 재료 사용에 엄격한 제한을 두지 않았다. 캔버스의 닫힌 영역을 벗어나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조각적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구축해 왔다.

크뇌벨의 개인전이 지난 4일 서울 통의동 리안갤러리에서 개막했다. ‘빅 걸과 프렌즈(Big Girl and Friends)’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생동감이 있는 인물을 추상적 형태로 묘사한 ‘빅 걸’ 연작을 비롯해 ‘형상(Figura)’, ‘요소(Element)’ 시리즈를 중점적으로 다양한 추상화를 걸었다. 2010년 이후 크뇌벨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50년 미술 작업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해 온 그는 궁극적으로 ‘본다’는 행위 자체를 시각언어로 형상화한다. 1980년대에는 실제 생활 공간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브제를 회화 재료로 사용하거나 섬유판을 캔버스로 활용했다. 1990년대부터는 알루미늄을 회화의 지지체로 끌어들였다. 젊은 시절 거울의 프레임 속에 층층이 겹친 금속 막대에서 영감을 받아 색을 흡수하지 못하는 알루미늄의 특성이 생경했다. 장르적 접근보다는 회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재료라는 점도 작용했다. ‘그려진 이미지보다 작품을 완성해 가는 행위와 관념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던 그에게 알루미늄은 평생 소중한 미술 재료가 됐다.

전시장에는 이미지나 패턴을 그리는 대신 단일 계열의 색과 다양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작품들이 관람객을 반긴다. ‘빅 걸’ 시리즈는 사각형의 캔버스 틀 안에 형상과 배경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회화의 규범을 깨고 기하학적 또는 유기적 형태의 틀로 다변화하는 ‘회화의 마술’을 보여준다. 차가운 알루미늄 위를 지나간 붓 자국을 그대로 드러내 색채가 가진 근원적인 생동감과 따뜻함을 아울렀다. 얼핏 보면 단순한 작품이지만 보면 볼수록 매력에 빠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작 ‘요소’ 시리즈는 알루미늄을 종이처럼 자르는 방식으로 색칠하는 회화 문법을 적용했다. 기하학적 직사각형이나 비정형의 유기적 형태의 면을 겹치고 쌓아 올린 게 마치 퍼즐 조각처럼 보인다. 조립식 알루미늄을 기하학적인 여러 형태로 잘라내고 색면 패널을 조합한 작품, 흰색과 검정 막대기 골조 구조체에 베이지색의 사각형을 수놓은 작품들에서도 생명체를 마주할 때 느껴지는 묘한 활력이 감지된다.

크뇌벨 회화의 가장 큰 매력 중 빼놓을 수 없는 하나는 관람객에게 사고의 확장을 경험하게 하는 점이다. 다양한 조형의 형식이 하나의 회화가 되면서 오브제나 붓질의 효과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기보다는 ‘끊임없는 조형 과정’에 애정을 쏟는 자체가 그에겐 작품이다. 이 과정에서 관람객이 경험하는 기발하면서도 색다른 감흥들이 곧 작품의 메시지인 셈이다. 자신의 회화를 ‘순수한 감각의 사막’이라고 정의하는 그는 “관람객의 감각은 물론 감수성과 같은 정신적 영역에 파고들어 역동적인 변화를 생산해내는 요소로서 기능한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다음달 31일까지.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