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기억에 의해 전혀 다르게 채색될 가능성도 있다. 과거사는 특히 그렇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일제 치하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을 두고 크게 나눠진다. 그런 역사 해석이 현재와 미래 문제까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올바른 역사 해석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안병직 교수와 이영훈 교수의 대담 형식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기파랑)는 짧은 시간을 들여 한국사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느낌이나 감정 등에 좌우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근현대사를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저자 중 안병직은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설립한 인물이고, 이영훈은 연구소의 튼튼한 기초석을 세운 사람이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철저한 실증사학이란 영역을 개척하는 데 이바지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 해석에 대한 민족주의적 시각이 가진 문제점을 제기하고 해결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특히 젊은이들도 일독할 수 있다면 반듯한 역사관을 갖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혼란과 갈등은 상당 부분 건강한 역사관 부재에서 비롯되는 면이 많다.
‘사상의 편력’ ‘한국 경제의 발자취1’ ‘한국 경제의 발자취2’ ‘역사의 그늘’ ‘선진화의 기로에서’로 구성된 이 책은 안병직 교수의 생생한 경험담을 더하고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자유의 이념이나 사유재산제도는 동양적 전제국가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문장에서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겪는 소란스러움의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역사가 무척 짧은 나라가 한국이다. “개인주의나 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들어온 것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외부의 힘, 주로 일본과 미국이 가져와 심어놓은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한다면 해방 이후에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토대로 나라의 진로를 선택하게 된 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다. 해방 시점에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지적 토대를 갖추지 못한 이 나라는 전혀 다른 길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가진 부정적 유산에도 불구하고 그 체제하에서 사유재산제도가 어느 정도 정착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책에는 안병직 교수의 사상적 전환이 소개돼 있다. 오늘날 운동권의 시각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제가 1980년대 후반에 중진자본주의론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전까지는 당연히 한국 경제에 대해 종속적이라는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에 크게 빚을 진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정부개입주의 정도는 더욱더 거세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오늘까지 오게 됐는지, 그리고 선진화로 가기 위해 무엇을 중하게 여겨야 하는지를 깨우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공병호 < 공병호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