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베트남 내 치열한 한·일전(戰), 최종 승자되려면

입력 2019-09-02 17:43
수정 2019-09-03 00:23
한·일전(戰)은 늘 흥미롭다. 하다못해 어린이 야구도 상대가 일본이면 관심 지수가 치솟기 마련이다. 일단 붙으면 이겨야 하는 게 한·일전이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은 극일의 통쾌함을 선사하고 있는 곳 중 하나다. 베트남 제1의 투자국은 한국이고, 1등 기업도 삼성전자다. 게다가 베트남 축구를 동남아시아 최강으로 만든 이는 한국인 박항서다. 적어도 전반전은 한국의 압승이라 할 만하다.

1945년 이후 동남아시아가 일본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베트남의 가치가 더욱 돋보인다.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동남아 전략은 ‘식민지’ 조선과는 달랐다.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구해주는 ‘해방자’로 행세했다. 일례로 인도네시아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은 친일을 자처했다. 그는 일본에 대한 부역이 훗날 네덜란드와의 일전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패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자 일본은 동남아 곳곳에 뿌려진 친일의 씨앗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일본 정부는 무상원조와 차관 형식으로 대량의 돈을 살포했다. 일본 은행과 기업들이 첨병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동남아 시장은 일본이 지배하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됐다. 태국과 대만은 ‘제2의 일본’으로 불릴 정도다. 인도네시아 자동차의 97%는 일본산이다.

일본의 촉수는 베트남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 기업과 기업인들이 위험을 불사하고 고난을 감수한 덕분에 오늘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일본이 하노이의 관문인 노이바이 국제공항을 공적원조(ODA) 자금으로 지으면서 자국 건설사들에 무위험의 혜택을 제공할 때 우리 건설사들은 공항에서 시내를 잇는 노이바이 고속도로 사업을 치열한 글로벌 경쟁 끝에 수주했다. 8월 말 현재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8000여 개다. 일본 기업은 1000개를 웃도는 정도다.

그러나 베트남 한·일전의 최종 승자가 누구일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경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후반전으로 갈수록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게 베트남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본은 뼈아픈 전반전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호시탐탐 역공을 준비 중이다. 한 베트남 진출 기업 관계자는 “국가 브랜드 관리 측면에서 한국은 일본에 한참 뒤처져 있다”며 “장기전으로 가면 일본이 훨씬 유리하다”고 우려했다. 베트남 언론사들이 하는 외국 선호도 설문조사에서 일본은 항상 1위다. 인적 교류 측면에서도 일본은 급소를 찌를 줄 안다. 국립하노이대, 백화대 같은 유명 대학의 젊은 교수들은 대부분 일본에 공짜 연수를 다녀왔다.

‘코리아 브랜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는 양적인 팽창과도 연관돼 있다. 빨래방, 인테리어, 미용, 외식 등 영세업체까지 전방위로 베트남에 진출하면서 한국 기업 간 과열 경쟁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시중은행만 해도 ‘베트남에 사무소라도 내지 않은 은행은 혈액은행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현지인과의 접점이 넓어지자 그만큼 갈등도 증가하고 있다. 한 제조업체 대표는 “베트남 상류층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한국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고 우려했다.

얼마 전 만난 베트남 전직 관료는 그들의 한·일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은 좋아하는 나라고, 일본은 존경하는 나라다’. 선호(選好)는 하루아침에도 바뀔 수 있지만, 존경의 뿌리는 깊다. 3개월 넘게 주베트남 대사직을 비워두고, 신남방정책이란 구호를 강변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 이유다.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베트남 진출 전략이 필요하다.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