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 김환기(1913~1974)는 생전에 “내가 조형미에 눈뜬 것은 도자기에서 비롯됐다”고 할 정도로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에 심취했다. 유백색 대호(大壺)와 청백색 달항아리의 군더더기 없는 절제미에 반해 수집에도 열정적이었다. 백자를 사들여 팔로 안아보고, 때로는 마당의 육모초석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며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1940년대 처음 달항아리를 소재로 다룬 ‘섬 스케치’를 비롯해 ‘항아리와 여인들’(1951), ‘항아리’(1957), ‘항아리와 매화가지’(1958) 등 명작을 쏟아내며 백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과시했다.
1949년에 제작한 ‘백자와 꽃’도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를 장인의 시각으로 화면에 올려놓은 수작이다. 우윳빛 달항아리를 중심에 두고 화사한 꽃과 고목, 산을 곁들여 백자 특유의 단순미와 고졸미(古拙美)를 응축했다. 도자기 아가리를 생략한 채 그려 넣은 항아리는 수묵처럼 번진 어둠을 흡수하며 보름달처럼 청청히 빛난다. 고목 줄기에서 뻗어 나와 둘로 갈라져 피어오른 꽃송이와 검은 색선으로 묘사한 산등성 역시 서로의 기세를 견주며 잔잔한 운율을 생성한다. 고목에 드리워진 항아리의 그림자를 두 개의 색면으로 처리한 것도 흥미롭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