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지역에서 12년간 대학 전업 강사로 일한 서모씨(46)는 올 2학기부터 학교가 아니라 편의점으로 출근한다. 지난 두 달간 13개 대학의 강사 공개채용에 지원했지만 모두 낙방했기 때문이다. 지난 1학기까지만 해도 세 개 대학에서 18학점을 맡아 강의하던 서씨는 한순간에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됐다.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신세 한탄을 할 시간도 없었다. 당장 생계가 위태로웠다. 서씨는 “일단 먹고살자는 생각에 집 근처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며 “수업 준비로 한창 바빠야 할 시기에 편의점 계산대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내 모습이 아직도 낯설다”고 말했다.
강원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임모씨(42)는 자신은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 태풍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강의 경력이 길진 않지만 학생들의 강의평가에서 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학교에서도 수차례 우수 강사로 선정되는 등 인정받는 강사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올 2학기 임씨가 맡은 강의는 3학점짜리 교양수업 한 과목이 전부다. 이마저도 폐강 위기다. 수강신청 기간이 끝나도록 최소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개강 후 1주일간의 정정 기간에도 학생들이 수업을 신청하지 않으면 임씨는 강의 기회를 잃는다.
한국경제신문이 2학기 개강을 앞두고 만난 강사들은 “강사법이 도대체 누굴 위한 법인지 모르겠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달 1일부터 시행된 강사법은 강사의 신분 안정과 처우 개선을 위해 마련된 법안이다. 대학은 방학 중에도 강사에게 임금을 주고, 1년 이상 임용을 보장해야 한다.
취지는 좋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고용 부담이 커진 대학은 선제 구조조정을 택했다. 교육부에 따르면 올 1학기 대학 강사 재직 인원은 전년 동기 대비 1만1621명(19.8%) 줄었다. 이 중 겸임·초빙교수 등 다른 교원 직위로 일하는 경우(3787명)를 제외하면 7834명(13.4%)이 강의 기회를 완전히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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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서 쫓겨난 강사 7800명…"일자리 보장한다더니 설 자리만 줄였다"
“결국 대학도, 강사도 상처만 입은 채 2학기가 시작돼버렸네요.”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이 적용된 첫 학기가 2일 시작됐지만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수도권의 한 시간강사는 이같이 말했다. 교육부에 따르면 시간강사 7834명이 올해 1학기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강단에서 쫓겨났다. 지난해 1학기 재직 중이던 시간강사(5만8546명)의 13.4%가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시간강사의 임용 기간을 사실상 3년 보장해야 하는 데다 방학 중 임금·퇴직금 지급 등으로 최소 연 2000억원의 추가 인건비를 부담해야 하는 대학들이 선제적으로 구조조정에 나섰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은 강사법 시행 한 달, 강사법이 적용되는 첫 학기 개강을 맞아 시간강사들을 만났다. 지역·전공·수입 등이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강사들은 한목소리로 “취지는 좋을지 몰라도 강사법은 명백히 실패한 제도”라고 입을 모았다.
강의 기회 뺏어간 강사법
충북·대전 지역에서 강사로 일해온 A씨는 올 2학기부터 수입이 3분의 1 이상 줄어든다. 새로 시행된 강사법은 한 학교에서 6시간 이상 강의를 못 하도록 제한해 2학기부터 강의 시간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강사법이 강의 시간을 제한한 이유는 대학이 소수의 강사에게 강의를 집중적으로 맡기는 ‘일감 몰아주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강의 기회를 다양한 강사에게 나눠주자는 취지지만 대학은 강사를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A씨는 “대학은 내가 하던 강의를 다른 강사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전임교원에게 강의를 맡기거나 이수학점을 줄이고, 대형 강의 비중을 높이는 방식으로 대응했다”며 “파이를 나누려다 파이를 아예 없애버린 꼴”이라고 꼬집었다.
이공계열 강사들은 강의 제한 기준을 ‘6학점’이 아니라 ‘6시간’으로 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반적인 인문계열 강의는 ‘1학점=1시간’ 공식이 성립되지만, 실험이 포함된 이공계열 수업은 1학점에 2시간이 배정된 게 대다수다. 강의료는 대부분 학점을 기준으로 지급되기 때문에 최대 시간인 6시간을 일하고도 인문계열 강사의 절반만큼만 강의료를 받게 된다. 수입이 반 토막 났다는 서울의 한 이공계열 강사 B씨는 “학과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6시간은 조교가 돕는 시간 등을 뺀 ‘교수시간’이기 때문에 이공계열 강사도 일한 만큼 6시간의 강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강사법은 지난해 강사 대표와 대학 대표, 국회 추천 전문가로 구성된 ‘대학 강사제도 개선 협의회’에서 8개월 동안 18차례 회의한 끝에 마련됐다. 그런데도 ‘실패한 제도’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은 정책 결과에 대한 과학적 분석 없이 합의만 끌어내는 데 집중한 교육부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강사법이 시행되면 대규모 실직이 발생할 것이라는 지적은 지난해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그러나 교육부는 올해 6월이 돼서야 BK21 등 재정 지원 사업과 강사 고용지표를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협의회에 참가한 한 단체 관계자는 “부작용을 막으려는 교육부의 노력이 너무 늦은 데다 강사를 줄이면 재정 지원을 깎겠다는 채찍만 있고 당근책은 제시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겸임 늘리는 대학들…“해법은 결국 재정”
수도권의 시간강사 C씨는 최근 강의해오던 대학으로부터 “이름만 올려놓을 개인연구소를 열고 사업자등록증과 함께 겸임교수로 지원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대학이 임용 보장 기간이 1년으로 시간강사보다 짧은 데다 4대 보험금과 퇴직금도 지급할 필요가 없는 겸임교수를 확대하려고 나선 것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겸임교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424명(24.1%) 증가했다. C씨는 “대학들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갖가지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대학을 탓할 수만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11년째 이어진 등록금 동결과 입학금 폐지로 재정 상황이 열악해진 대학들이 강사법 시행에 따른 추가 인건비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기는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이재은 전국대학교교무행정관리협의회장은 “그동안 시간강사의 처우가 열악했던 것은 대학들이 자성해야 할 부분”이라면서도 “강사법 취지를 살리기 위해선 등록금 인상 허용이나 정부의 재정 지원 확대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
대학 시간강사의 고용 안정과 처우 개선을 위해 지난 8월 1일부터 시행됐다. 대학은 강사를 1년 이상 임용해야 하고 3년 동안 재임용 절차를 보장해야 한다. 강사에 대한 퇴직금 지급과 4대 보험 가입도 의무화돼 대학의 인건비 부담이 늘었다.
박종관/정의진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