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세금을 거두다/걷다'는 둘 다 쓸 수 있어요

입력 2019-09-02 09:00
계절은 어느새 가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추수를 앞두고 들녘은 ‘가을걷이’ 준비가 한창이다. 이때의 ‘걷이’는 ‘걷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파생명사다. 또 ‘걷다’는 본말 ‘거두다’가 줄어든 말이다. ‘열매를 걷다’ ‘곡식을 걷다’ ‘추수를 걷다’ 등에 쓰인 ‘걷다’가 모두 ‘거두다’에서 온 말이다. 준말과 본말을 함께 쓸 수 있다.

성공은 ‘거두는’ 것, 빨래는 ‘걷는’ 것

‘거두다→걷다’는 우리말 준말이 만들어지는 여러 원칙 중 하나를 보여준다. 즉 어간에서 끝음절의 모음이 줄어들고 자음만 남는 경우 자음을 앞 음절의 받침으로 적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제저녁→엊저녁’처럼 남은 자음 ‘ㅈ’이 앞 음절의 받침으로 온다. 한글맞춤법 제32항 규정 중 하나다. ‘가지다→갖다’ ‘디디다→딛다’도 같은 방식으로 줄어들었다.

다만 ‘거두다’는 의미용법이 워낙 많아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 가령 ‘열매를 거두다/걷다’를 비롯해 ‘세금을 거두다/걷다’는 ‘본말/준말’ 관계다. 두 가지 다 쓸 수 있다. 하지만 ‘성공을 거두다’ ‘아이를 양자로 거두어 키웠다’ 같은 데 쓰인 ‘거두다’는 ‘걷다’로 줄지 않는다. ‘거두다’만 가능하다. ‘웃음을 거두고’ ‘의혹의 시선을 거두었다’에서도 ‘거두다’만 되고 ‘걷다’는 안 된다.

반면 ‘소매를 걷고’ ‘커튼을 걷어라’ ‘비가 오려 해서 빨래를 걷었다’에서는 ‘걷다’만 되고 ‘거두다’는 못 쓴다. 이때는 ‘걷다’가 본말이기 때문이다. ‘거두다’에서 온 말이 아니다. 이들을 일일이 용례별로 외워 쓰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말을 해봐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표현을 고르면 된다. 모국어 화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가령 누구나 “유종의 미를 거뒀다”고 하지 “~걷었다”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갖다’ 등 특정단어는 모음어미로 활용 못해

‘거두다/걷다’ ‘가지다/갖다’ ‘디디다/딛다’가 같은 방식으로 줄었지만, 이들의 활용에는 좀 차이가 있다. ‘걷다’는 ‘걷고, 걷지, 걷게, 걷어, 걷으니’ 식으로 어떤 활용도 가능하다. 하지만 ‘갖다’와 ‘딛다’는 ‘갖어, 갖으니’, ‘딛어, 딛으니’라고 하지 못 한다. 즉 준말에서 모음어미의 활용이 안 된다. 모음어미가 올 때는 오로지 본말(‘가져, 가지니//디뎌, 디디니’)로만 써야 한다는 뜻이다.

‘서투르다’가 줄어든 ‘서툴다’도 마찬가지다. 이를 활용하면 ‘서툴지, 서툴고, 서툴어서, 서툴었다’ 식으로 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론 ‘서툴어서(×), 서툴었다(×)’는 허용되지 않는다. 모음 어미가 연결될 때 준말의 활용형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에 해당하는 것은 ‘머무르다/머물다’ ‘서두르다/서둘다’ ‘잡수시다/잡숫다’ ‘건드리다/건들다’가 더 있다.

한글 맞춤법이나 표준어 사정 원칙에서는 준말이 특정 단어에서 모음어미 활용이 안 되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이로 인해 국어 사용자의 혼란이 크다. 가령 표준어 사정원칙 제16항에서는 ‘서두르다/서둘다’ ‘머무르다/머물다’ ‘서투르다/서툴다’를 복수표준어로 제시하면서 “모음 어미가 연결될 때에는 준말의 활용형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단서를 붙였다. 이로 인해 준말에서는 모음어미 활용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꽤 있다.

하지만 이는 특정 단어에 적용되는 것일 뿐 일반원칙은 아니다. 정리하면 준말의 모음어미 활용이 안 되는 단어는 ‘갖다(←가지다), 딛다(←디디다), 머물다(←머무르다), 서둘다(←서두르다), 서툴다(←서투르다), 건들다(←건드리다), 잡숫다(←잡수시다)’ 등에 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