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기능올림픽 '역주행'

입력 2019-08-29 18:17
수정 2019-08-30 00:14
6·25전쟁의 참화가 채 가시지 않았던 1960년대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소년 가장 배진효도 마찬가지였다. 1963년 경남 진주에서 무작정 상경한 15세 청년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제화점을 찾았다. 그곳에서 밤낮으로 기술을 습득한 그는 한국이 처음 출전한 1967년 제16회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양복기술자 홍근삼 씨와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금메달 스토리’는 극적이었다. 한국 선수단은 수상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고, 처음에는 양복과 제화 부문 참가를 포기했다. 목공 등 일반 기능 분야와는 달리 세련된 디자인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근무 중인 제화점과 양복점이 경비를 대는 조건으로 겨우 참가했고, 결국 인생역전을 일궈냈다.

국민들은 두 사람을 보기 위해 카퍼레이드 구간(김포공항~서울시민회관) 도로변을 가득 메웠다. 박정희 대통령은 약속했던 ‘금일봉’ 100만원을 내줬다. 당시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기능올림픽은 변변한 일자리조차 없던 시절에 한 개인에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였다. 기술을 갈고 닦은 수많은 청년들은 기능장으로 성장해 조국 근대화의 초석이 됐다.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한국 선수단은 전무후무한 기능올림픽 기록을 세웠다. 1977년 제23회 대회에서 첫 종합우승을 차지한 이래 지금까지 19차례 종합우승을 했다. 두 번째로 종합우승 기록이 많은 일본이 6차례다.

한국이 최근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제45회 대회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밀려 3위에 그쳤다. 1971년 스페인 대회(4위) 이래 최저 성적이다. 뿌리 깊은 학력 중시 풍토 탓에 마이스터고 등 특성화고 학생이 점점 줄고, 기능인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는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일부에선 “빅데이터 등이 지배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능올림픽 성적이 떨어졌다고 우려할 상황이 아니다”는 주장도 나온다. 기술강국인 일본(8위)과 독일(11위)도 우리보다 더 저조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지식이 축적된 선진 기술강국이 아니다.

게다가 이번 대회에서 52개 금메달 중 5개가 걸린 제조업 경쟁력 잣대인 기계 부문에서 ‘노메달’에 그친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기능이 기술로, 기술이 혁신을 이끄는 촉매가 될 수 있도록 기능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시급하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