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칼럼] 脫진실 넘어 '탈도덕' 시대인가

입력 2019-08-29 18:03
수정 2019-08-30 00:16
“세상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네 가지 있다. 입 밖에 낸 말, 공중에 쏜 화살, 지나간 인생, 그리고 놓쳐 버린 기회.” 세계적인 SF작가 테드 창의 단편소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 나오는 구절이다. 작가는 묻는다. 20년 전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면 당신은 뭘 하겠는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도 어쩌면 지금 자신을 리셋하고 싶을 것이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는 무엇을 고칠까. 입 밖에 뱉어낸 말일까, 말과는 정반대였던 특권과 반칙의 행위일까. 국민 과반이 실망한 것은 무엇보다 그의 말과 행동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난다는 점이다. 과거 소셜미디어에 늘어놓은 타인에 대한 날선 비판의 언어들이 부메랑이 돼 지금의 의혹들과 1 대 1로 매치된다. ‘조적조(조국의 적(敵)은 과거의 조국)’인 셈이다.

“지금 이 순간도 잠을 줄이며 한 자 한 자 논문을 쓰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있다.”(2012) “장학금 기준은 성적 중심에서 경제상태 중심으로 옮겨야 한다.”(2012) “이 금수저들이 딸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온갖 국정을 농단하고 부를 챙기고 지위를 챙기는 데 분노한 것이다.”(2017) 그랬던 그의 딸은 2주 인턴으로 의학논문 제1저자에 오르고, 50억원대 자산가이면서 자식 장학금은 꼬박꼬박 챙겼고, 정체가 모호한 사모펀드에 온 가족이 몰빵했다. 이 인식과 현실의 괴리를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조 후보자의 해명은 “실체적 진실과 많이 다르다” “불철저했다”는 것이었다. 드러난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 인식과 관념이 진실이 되는 ‘탈(脫)진실(post-truth) 시대’라고 강변하고 싶은 것인가. 탈진실을 넘어 옳고 그름의 판단기준이 ‘탈도덕’의 시대로 치닫는 듯하다. 부(不)도덕을 넘어 아예 도덕적 판단이 거세된 ‘무(無)도덕’ 상태다.

조 후보자를 엄호하는 이들도 비슷한 증세를 보인다. “완벽하게 훌륭하지 않다고 비난한다.”(유시민) “지난 정권들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못 되는 사건.”(이외수) “내가 아는 조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직을 하거나 이익을 따져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다.”(표창원) “이 싸움은 촛불의 의미까지 포함된, 정말 꼭 이겨야 하는 싸움.”(공지영)

이들에게서 진실 여부의 잣대는 오로지 진영논리 외에는 안 보인다. 종교든, 이념이든 한국에만 들어오면 극단화하는데 진영논리라고 다를까 싶다. 진영논리의 원천은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에서 지적한 ‘간극 본능’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에게는 이분법적 사고를 추구하는 강력하고 극적인 본능이 있고, 우리(us)와 그들(them) 사이에는 실체 없는 간극뿐이란 얘기다.

유시민은 “조국 사태를 보며 사람들이 무섭다”고 했다. 인사검증을 바라보는 시각이 내 편일 때와 남의 편일 때가 이렇게 다르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똘똘 뭉쳐 ‘조국 힘내세요’ ‘가짜뉴스 아웃’ 등의 검색어 전쟁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그 맹목적 신앙이 더 무섭다고 한다.

조 후보자는 장관 임명 여부에 관계없이 ‘내로남불의 끝판왕’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프랑스 사회심리학자 로랑 베그는 그런 이중성이 당사자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오히려 그 사람을 지배한다고 했다. “가면은 오랫동안 피부에 달라붙고, 위선은 결국 진심이 돼 버린다.”(공쿠르 형제) 가면을 오래 쓰면 그게 얼굴이 된다는 얘기다. 유럽 언어에서 위선자(hypocrite)는 본래 무대 위 배우를 가리켰다.

이 정부의 ‘상징자산’으로 여겨졌던 조 후보자의 영욕은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유효기간이 지난 ‘386 꼰대’의 몰락 서막일 수도, 미래세대가 각성하는 계기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내로남불’의 이중성을 극복하려면 사실에 충실하고, 진실을 추구하며, 도덕잣대의 상대성을 배격해야 한다. 진실과 윤리를 성찰하지 않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조 후보자는 역설적으로 기여했다고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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