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조세심판원, 존재이유를 되새겨야

입력 2019-08-25 17:21
수정 2019-08-26 00:20
로마 시민법 격언 중에 ‘법률의 무지는 아무도 변명해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세금 관점에서 풀어보면 스스로 세법을 잘 알고 납세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세법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조문을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의 효력과 권한까지도 숙지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일반 납세자 중에 이런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상고를 갓 졸업한 여성이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어느 날 사장이 인감을 잠시 빌려달라고 해 건네줬더니, 사장은 몰래 회사 주식을 그 여직원 명의로 취득했다. 몇 년 뒤 회사는 부도가 났고 그는 야반도주했다. 세무서는 이 여직원을 ‘제2차 납세의무자’로 지정한 뒤 결혼자금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압류했다. 세법에 대한 무지가 빚은 참극이다. 어디 가서 억울함을 호소해야 할까.

세법에 모든 경제 현상을 담아 규정할 수는 없다. 빈 곳이 있다. 이 경우 ‘조세법률주의’라는 씨줄과 ‘조세공평주의’라는 날줄을 이용해 해석한다. 한글로 쓰였지만 납세자와 세무서의 해석은 각각 다를 수 있다. 세금 다툼이 있으면 법원에 가기 전 조세심판원에 행정심판을 청구해야 한다. 행정부 차원에서 스스로 문제를 바로잡는 자기통제의 역할과 전문성을 믿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금 다툼의 대다수는 소송까지 가지 않고 행정심판 단계에서 끝난다.

그런 점에서 2008년 설립된 조세심판원은 세금 분쟁과 관련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한 해 심판청구 건수는 설립 당시보다 70% 이상 늘어난 9000여 건에 이르고, 해당 세액은 6조원을 웃돈다. 그런데 이를 담당하는 상임심판관은 설립 때나 지금이나 6명이다.

업무가 폭증하다 보니 사건당 평균 심리시간이 8분에 불과하다. 이런 환경은 성실한 납세자의 권리구제는 외면하고, 고루한 판결이나 과거 결정에 기댄 기계적 판단을 하게 할 개연성도 있다.

조세심판원은 심판청구를 받은 날부터 90일 내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인력 부족으로 태반이 6개월을 넘겨 결정하고 있다. 정부 스스로 법률을 위반하고 있는 셈이다.

세간에 무전유세(無錢有稅)라는 말이 있다. 성실한 납세자라도 유능한 조력자를 구할 돈이 없으면 안 낼 세금도 내야 하는 세상이라는 자조 섞인 말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세무행정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조세조항이 일어나게 된다. 조세심판원의 획기적인 조직 확대와 인력 보강이 필요한 이유다.

앞에서 언급한 여직원이 양질의 조력을 받지 못해 파산하고 만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 것인가. 성실한 납세자의 세법 무지에 따른 다툼은 조세심판원이 보듬어야 할 영역이다. 공평한 추는 세우되 속이는 저울은 골라내야 한다. 이 지점에 조세심판원의 존재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