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만에 1000원이 깨졌다고?”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으로 원·달러 환율이 넉 달에 걸쳐 가파르게 상승하던 2008년 7월 9일. 서울 여의도에 모여 점심을 먹던 외환 딜러들이 회사로 달려갔다. ‘환율이 달러당 1030원대에서 990원대로 폭락했다’는 긴급 문자를 받은 직후였다. 거래가 뜸한 점심시간을 틈타 60억달러(약 6조원)가량을 쏟아부은 주체는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었다. 치솟는 환율(원화가치 하락)을 상대로 외환당국이 전쟁을 선포한 이른바 ‘도시락 폭탄’ 사건이었다.
외환당국은 이후에도 달러당 1020원 수준을 최종 방어선으로 삼아 달러를 융단폭격했다. 그래도 ‘안전자산’ 달러를 향한 도피 수요가 꺾이지 않자 8월 7일에는 ‘최종병기’인 기준금리 인상(연 5.00%→5.25%)까지 동원했다. 환율 상승 기대를 꺾어 금융시장의 안정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당시엔 ‘사마귀가 수레를 막아선 격’이란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세기적 사건’으로 불리는 세계 4위 투자은행(IB)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두 달여 전이었다.
‘세기적 사건’의 징후
‘도시락 폭탄’ 사건 1년 전만 해도 외환당국은 환율의 상승이 아닌 하락을 걱정했다. 원·달러 환율이 2001년 1360원대를 정점으로 줄곧 내리기만 하면서 수출산업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닷컴 버블’ 붕괴의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미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를 2003년 연 1.00%까지 인하한 여파였다. 낮은 달러 이자에 실망한 많은 선진국 금융회사들은 한국 등 신흥국 통화로 환전해 현지 자산에 투자했다.
환율은 미 주택시장이 흔들리기 시작한 2007년 가을 달러당 900원까지 떨어졌다. 호황기 시장을 낙관하고 주택담보대출을 내줬던 미 금융산업 곳곳에서 신음이 터져나오던 때였다. 무역과 재정 ‘쌍둥이’ 적자도 세계 최대 경제대국의 미래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반전을 이끄는 사건은 2008년 봄에 등장했다. 주택담보대출 관련 자산이 부실화돼 자금난에 시달리던 세계 6위 IB 베어스턴스는 그해 3월 경영권을 JP모간체이스에 넘긴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뉴욕연방은행이 이 거래의 성사를 돕기 위해 JP모간체이스에 290억달러(약 30조원)의 저리(低利) 대출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당시 시장은 Fed가 왜 막대한 혈세를 동원하면서까지 거래에 참여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미 금융산업이 통째로 붕괴 위기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美 금융산업의 파산 위기
미 주택담보대출의 부실화는 월가의 자랑거리였던 파생상품시장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금융회사들은 부동산 호황기인 2001년부터 2006년 사이 주택담보대출채권을 뭉치로 사고팔며 고수익을 만끽했다. 집주인이 내는 이자와 원금으로 수익을 내는 이 채권뭉치는 주택저당증권(MBS)이란 이름으로 시장에 돌아다녔다.
IB들은 주택저당증권을 기관투자가 입맛에 맞게 더 매력적으로 ‘포장’하는 경쟁을 벌였다. 다른 종류의 채권과 섞거나, 위험(원리금 상환 순서, 만기 등)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쪼갠 뒤 되팔았다. 부채담보부증권(CDO)으로 불리는 이 재포장 상품은 별도의 포장지값(수수료)을 지급해야 했지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신용평가사들과 짜고 실제 상품의 위험보다 높은 신용등급을 달고 나왔기 때문이다.
두둑한 보너스를 꿈꾸는 CDO 공장은 24시간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갈수록 더 많은 원재료(주택저당증권)를 필요로 했다. 모자란 재료는 가난한 가계와 학생을 꼬드겨 내준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채워넣었다.
파생상품시장의 추악한 실상은 2007년 이자를 못 내는 채무자와 ‘깡통’ 주택이 속출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6년에만 4700억달러(약 470조원)어치가 팔린 CDO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리먼브러더스, 메릴린치, AIG 등 몇 달 새 수천 개 금융회사가 파산할지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9월 위기설’ 확산
부도 공포에 휩싸인 글로벌 금융회사들은 2008년 여름부터 세계에 뿌려놨던 투자금을 황급히 달러로 바꿔 회수하기 시작했다.
오랜 환율 하락에 익숙해 있던 한국 등 개발도상국 정부는 갑작스러운 시장의 변심에 크게 당황했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대로 치솟은 상황에서 수입물가 관리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그해 6월 5.5%로 치솟았다.
경기침체와 동시에 나타난 물가 급등은 모든 경제주체의 고통을 키웠다. 2008년 5월 광우병 공포가 촉발한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는 점차 반정부 시위로 번졌다. 금융시장에선 ‘제2의 외환위기’ 괴담이 전염병처럼 퍼졌다. 국내 은행들의 달러 채무 만기가 몰린 ‘9월 위기설’이 언론의 헤드라인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가 급등과 외환위기 괴담을 막아야 하는 강만수 기재부 장관과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7월 9일의 ‘도시락 폭탄’을 기획했다. 환율을 인위적으로 끌어내려 수입물가를 낮추고, 한국 경제(원화가치)가 튼튼하다는 자신감을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9월에 접어들자 시장은 손쓸 수 없는 공황상태로 변했다. 9월 1일 환율은 1116원으로 하루 27원 급등했다. 겁먹은 정부는 외화의 급속한 유출을 차단했다. 막바지 협상을 하던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인수도 철회했다. 이 결정은 9월 위기설을 현실로 바꿔놓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선택의 기로
“국내외 금융시장 상황을 고려해 협상을 중단했다.” 산업은행은 9월 10일 리먼브러더스 인수 협상 중단을 공식 발표했다. 당시 주택저당증권에서 대규모 손실을 내고 있던 리먼은 자금조달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산업은행과의 협상 경과만 바라보던 리먼의 주가는 외신이 결렬 소식을 보도한 현지시간 9월 9일 하루 새 45% 폭락했다.
산은과의 협상은 당시 리먼의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앨런 그린스펀 전 Fed 의장은 협상 결렬 발표 나흘 뒤 미 ABC방송에 출연해 “세기에 한 번 있을 법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며 위기의 확산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러면서 “미 정부는 재정을 쓰지 않을 수 있는 (리먼의 회생)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지원할지 청산할지 결정해야 한다”며 금융산업을 덮칠 거대한 충격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당시 미 정부와 Fed는 ‘월가의 탐욕이 만들어낸 손실을 국민 혈세로 메우고 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9월 초 양대 MBS 보증기관(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무려 2000억달러(약 200조원)를 투입한 뒤로 여론은 더욱 나빠졌다. 금융시스템의 충격을 막으려면 리먼을 반드시 살려야 했다. 하지만 정부가 이대로 계속 구멍을 메워준다면 금융회사들에 ‘대마불사’의 잘못된 믿음을 심어줄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결론을 내야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시작
‘158년 역사 리먼, 파산.’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9월 15일 월요일 오후 2시(뉴욕시간 새벽 1시). 리먼브러더스홀딩스는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대마(大馬)’의 죽음을 방치한 미 정부는 후폭풍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리 짜둔 각본대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파산 발표 당일 리먼의 ‘다음 타자’로 손꼽혔던 미 최대 증권사 메릴린치를 미 최대 상업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에 넘긴다고 발표했다.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는 400억달러(약 44조원)의 긴급자금을 신청했다.
한국 정부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금융당국은 리먼의 파산 당일 “국내 금융회사들이 리먼 관련 자산에 투자하거나 대출한 규모가 6월 말 기준 7억2000만달러(약 7900억원)”라고 공개했다. 그러면서 이 금액이 “국내 은행 당기순이익의 3% 수준에 불과하다”며 시장을 안심시켰다.
마침내 세계에 퍼져 있던 리먼의 6130억달러(약 670조원) 규모 ‘부채 지뢰’가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했다. 중앙은행들의 공격적 기준금리 인하로 이어지는 10월의 자산가격 대폭락, 그 거친 파동을 예고하는 ‘사이드카(주가 급등락 경고)’가 지구촌 모든 주식·채권·외환시장에서 울려 퍼졌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