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하는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
“전 세계 어딜 가든 번영하는 ‘차이나타운’이 있게 마련인데, 딱 두 나라에만 없습니다. 바로 한국과 일본입니다.”
중국 관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종종 듣는 말이다. 남미 안데스 산맥이나 아프리카 오지의 소도시에 가더라도 ‘차이니즈 레스토랑’ 간판이 한두 개는 꼭 있다. 물론 현지 화교가 운영한다. 그런데 중국집을 화교가 아니라 현지인이 대부분 운영하는 나라는 아마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1960년 국내에는 약 2400개의 중화요리점이 있었는데, 화교가 거의 다(95%) 운영했다. 지금의 서울 명동 중앙우체국 뒤편 금싸라기 땅에는 그럴듯한 차이나타운도 있었다.
우리나라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가 들어올 때 따라온 청상(淸商)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서민 필수품인 석유, 성냥, 주단포목 등을 팔며 터전을 잡았다. 1883년 166명에 불과하던 국내 화교는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7만여 명으로 늘어나 중화요리점뿐만 아니라 화교양복점, 화교이발소 등을 운영했다.(이정희 <화교가 없는 나라>, 2018)
이뿐만 아니라 세계 3대 채소 산지인 산둥성 출신의 화농(華農)들이 고추·파·마늘 농사를 지어 채소를 공급했다.
동남아는 아예 ‘리틀차이나’
세계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뿌리를 내리는 한족의 놀라운 생활력은 동남아시아에서 볼 수 있다.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만 약 4000만 명의 화교가 있다. 현지 인구의 10%인 이들이 동남아 경제의 3분의 2를 장악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선 겨우 4%의 화교가 현지 경제의 80% 정도를, 필리핀에서는 1.3%가 60%를 차지한다. 말레이시아에선 10대 부호 중 9명이 화교다. 싱가포르는 아예 ‘리틀차이나’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를 포함해 인구의 77%가 화교다.
태국 CP그룹처럼 제조업을 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화교 기업은 부동산, 금융, 유통, 음식료 같은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유대인 뺨치는 상술을 가진 이들은 국가 기간산업보다는 ‘금방 돈 냄새가 나는 곳’인 비(非)제조업 투자를 선호한다. 거꾸로 해석하면 현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화교 자본이 동남아 국가의 산업화에 필요한 철강, 자동차, 반도체 같은 제조업에 대한 장기적 투자는 꺼린다는 얘기다.
동남아, 특히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 가서 협상할 때 주의해야 할 금기사항이 하나 있다. 절대 화교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동남아에는 경제적 지배자인 화교와 현지인 사이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종족 갈등’이 잠재해 있다. 1995년 인도네시아에서 반(反)화교 폭동이 일어났고, 말레이시아는 아예 화교로부터 현지인을 보호하기 위해 ‘부미푸트라’ 정책을 쓴다. 이는 말레이계와 중국계 화교 간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해 1971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말레이계 우대’ 정책이다. 패권국가를 꿈꾸는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동남아 경제를 ‘위대한 중화경제권(Greater Chinese Economic Zone)’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것도 또 하나의 불안 요인이다.
아프리카까지 잠식하는 중국인들
풍부한 자원과 시장에 눈독을 들인 중국은 아프리카에 개발원조 명목으로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다. 중국식 개발원조에는 ‘독특한 함정’이 있다. 바로 한족의 이주다. 모잠비크에 무려 6000만달러를 투입한 호화 축구장을 무상으로 지어주며 중국인 노동자를 데려다 쓴다. 그중 상당수가 현지에 슬며시 주저앉아 200만 명 정도의 중국인이 아프리카 곳곳에 퍼져 현지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잠비아에만 10만 명의 화교가 노점에서 싸구려 옷가지를 파는 데서 시작해 돼지, 닭까지 키워 아프리카인들과 충돌하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인 이 나라 구리 광산의 80%를 소유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을 두고 하워드 프렌치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같은 지역전문가는 ‘아프리카가 중국의 두 번째 대륙이 되고 있다’고 경고한다.(H 프렌치 <아프리카, 중국의 두 번째 대륙>, 2015)
“프랑스 영국 같은 서구 제국주의가 ‘아프리카에 아무것도 안 주고 착취’만 한 데 반해 중국은 공짜로 많은 인프라를 건설해 줬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중국인을 열렬히 환영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슬슬 자원 개발에 눈독을 들이고 식당, 호텔, 상점, 심지어는 아프리카에 와서 농사까지 지어요. 과거 유럽인들은 상층부의 고급 비즈니스만 해서 나머지 허드렛일을 가지고 아프리카인들이 먹고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의 중국인들은 노점상까지 해가며 말 그대로 싹쓸이를 해서 아프리카 서민들 생활까지 위협합니다. 그리고 식당, 호텔을 하면서 현지인을 안 쓰고 꼭 중국인만 써요.” 2017년 가을 부산에서 열린 국제세미나에 참석한 코트디부아르와 잠비아에서 온 지식인으로부터 아프리카의 중국인에 대해 들은 이야기다.
한국선 뿌리 못 내린 한족의 생활력
한국에선 1976년 3만2000여 명이던 화교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거의 모두가 미국, 대만, 중국으로 떠나갔다. 뉴욕이나 밴쿠버에 가면 영어로 ‘Chinese Restaurant’이라고 써 놓고, 한글로 ‘짜장면’ ‘짬뽕’이라고 쓴 중국집을 가끔 볼 수 있다. 이는 십중팔구 한국에서 온 화교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반가운 마음에 그 집에 들어가 ‘코리안’이라고 말하면 주인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하다. 많은 화교가 차별 때문에 등 떠밀려 한국 땅을 떠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68년 외국인토지법을 개정해 화교의 영업용 점포 규모를 165㎡가 넘지 못하게 하고 토지 소유도 제한했다. 그 좋은 부동산 경기 한번 못 타게 했으니 우동, 짜장면만 팔아서는 한국에선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 같은 차별은 화교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내 대기업 중심의 산업화 전략을 추진한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외국 자본, 외국 기업에 아주 배타적이었다.
미국의 중국인 이민금지법
‘이민의 나라’ 미국에서도 중국인 이민을 제한한 역사가 있다. 1882년 제정된 ‘중국인 이민금지법(Chinese Exclusion Act)’이다.
6년간 공사를 거쳐 1869년 완공된 미국 대륙횡단철도의 가장 어려운 공사 구간은 로키산맥이었다. 해발 4000m가 넘는 높은 산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지나는 이 험난한 공사 구간에서 가장 땀을 많이 흘린 사람들은 센트럴 퍼시픽 철도회사가 중국서 데려온 7만5000명의 노동자, 일명 쿨리(coolie·苦力)였다. 1850년대부터 1880년까지 무려 18만8000명의 중국인이 미국으로 몰려갔다.
특히 1870년 대륙횡단철도 공사가 끝나 눌러앉은 중국인은 샌프란시스코 인구의 8%를 차지하며 현지 상권과 노동시장을 장악해 갔다. 이에 놀란 미국이 중국인 이민을 금지하는 입법을 하고, 60년이 지난 1943년이 돼서야 이를 폐지했다. 역사의 가정이지만 만약 몰려오는 중국인을 그대로 방치했다면 지금쯤 캘리포니아는 ‘차이나포니아’가 돼 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초 파나마운하를 건설할 때도 미국은 중국인 노동자 쿨리를 대거 데려왔다. 공사기간만 무려 35년이 걸려 1914년 8월 대망의 운하 개통식을 앞두고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 열악한 정글에서 헌신적으로 일한 중국인들이 미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데, 당시 미국에선 ‘반(反)중국인 이민’ 분위기였다. 그런데 정말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운하 완공을 앞두고 그 많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운하가 완공되면 아메리칸이 차이니즈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린다’는 유언비어에 야반도주한 것이다. 골치 아픈 ‘차이니즈’ 문제를 일거에 해결한 이 유언비어를 누가 퍼뜨렸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안세영 < 성균관대 특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