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생 이춘강은 ‘아내의 조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용모가 아름다운 것보다 마음성 좋고 취미가 고상한 여자로, 취미가 같아야 하고…”. “졸업하고 집에 들어앉은 여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남편감으로 “침착하고 취미가 넓은 사람”을 꼽았다. 음악이나 문학 등 취미가 넓으면 “화평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서다. 부부간 문제 중 “생리적 결함” 다음으로 꼽힌 것은 “취미가 다른 것”이었다.
문경연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가 쓴 <취미가 무엇입니까?>에 소개된 한 여성 월간지의 기사 내용이다. 언제쯤 어디에 실린 기사일까? 요즘 잘 쓰지 않는 말투나 단어들을 보면 20~30년 전께로 미뤄 짐작되지만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23년 창간된 ‘신여성’이란 잡지의 1024년 5월호 ‘결혼 문제’ 특집 기사다.
이 책은 한림과학원의 ‘한국개념사총서 일상 편’ 중 ‘취미’ 편으로 기획됐다. ‘취미(趣味)’라는 일상 개념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형성되고 변천하는 양상을 20세기 전반 다양한 근대 매체의 텍스트와 담론을 분석해 재구성했다.
저자에 따르면 취미는 한국 근대의 산물이다. 서구의 ‘taste’가 일본에서 ‘슈미(しゅみ·趣味)’로 번역돼 한국에 이식됐다. 1900년대 등장한 취미는 근대적 삶의 양태로 제시됐다. 문명인의 인격과 품성, 근대적 지식과 앎의 차원, 근대인의 직업과 취미의 상관성 등이 강조됐지만 다소 관념적인 차원이었다. 1920년대가 되면 일제의 식민지 통치 전략과 맞물려 취미는 구체적인 활동과 실천으로 현실에서 소비됐다. 신파극, 영화, 음반 등 자본주의적 대중문화 속에서 사회적 현상과 유행을 만들어냈다. 이 무렵에 취미가 개인의 개성과 특징을 함축하는 요소로 자리잡았다. 출신학교, 직업과 더불어 취미를 밝히는 것이 근대적 사교 매너로 정착했다. ‘신여성’ 기사에서 보듯이 ‘취미=인격’이란 새로운 믿음으로 취미가 연애와 배우자의 ‘조건’으로 꼽혔다.
1940년대 일제강점기 말기 전시 체제가 가동되면서 취미 개념은 심각한 굴절 현상을 보였다. 당국은 언론 통제를 통해 조선인을 ‘총후국민(銃後國民)’으로 결집하고자 ‘취미’를 전유하고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저자는 “한국의 근대 ‘취미’ 개념은 시기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사회적 흐름과 결부되면서 외연을 확장해 나갔다”며 “식민지 대중문화 형성 과정과 제국의 통치전략에 호응 또는 길항하며 근대적 ‘제도’로 자리잡았다”고 설명했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