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어느 연구소가 이력서에 학교도 못쓰게 합니까"

입력 2019-08-22 15:30
수정 2019-08-23 02:02

유럽 명문 대학에서 사회과학 분야 박사학위를 받은 A씨는 최근 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직에 지원했다가 서류 단계에서 탈락했다. 그런데 이유가 황당했다. “학력과 출신 지역을 암시하는 내용 때문에 감점됐다”는 게 인사담당자의 설명이었다. A씨는 “전공 관련 성과와 직무 적합성 등을 설명하려면 유학 경험을 언급해야 하는데 이런 내용을 못 쓰면 도대체 어떻게 경쟁력을 증명할 수 있는지 답답하다”고 했다. 그는 “이런 문제를 공론화하고 싶어도 행여 불이익을 받을까봐 속만 끓이는 해외 유학파 박사들이 넘쳐난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에 블라인드 채용이 도입된 지 2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고 있다. 각 기관과 직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인 기준을 강요해서다. 대표적인 곳이 국책연구기관이다. 연구인력의 ‘핵심 경쟁력’인 학력을 빼놓고 실력을 평가하려다 보니 전형 단계만 늘었고, 우수한 인재를 뽑기는 더 어려워졌다는 하소연이 커지고 있다.

채용 때 한국만 못 보는 ‘연구 경쟁력’

전 세계 연구기관이나 대학들이 연구원을 채용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건 지원자가 석·박사 학위를 받은 학교와 전공이다. 연구자들을 평가하기에 가장 적합한 ‘정량 지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7년 7월부터 한국 국책연구기관들은 블라인드 채용이 의무화되면서 연구직 채용 시 학력을 평가 기준으로 활용할 수 없게 됐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경제 관련 기관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처럼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곳까지 예외는 없었다. 한 국책연구기관 고위 관계자는 “학력을 보면 학풍부터 지도교수까지 지원자의 경쟁력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압축적으로 알 수 있다”며 “연구인력은 대학 입시나 기업 채용 시험처럼 자질을 보는 게 아니라 능력을 보고 뽑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구직 블라인드 채용 2년을 평가하면, “학력은 학력대로 보면서 비용과 고생만 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전에는 연구기관들이 대개 서류 심사와 면접 등 두 단계 전형으로 연구원을 채용했다. 하지만 블라인드 채용이 도입되면서 대부분 연구기관들은 지원자가 자신의 논문을 직접 발표하는 ‘논문 세미나’ 전형을 신설했다. 실력을 보기 위해서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지만 사실상 ‘얼굴 확인용’이라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최근 국책연구기관 면접 전형에 외부 평가위원으로 들어갔던 B교수는 “논문 제목만 인터넷에 쳐 봐도 학교와 지도교수 이름까지 나오는데 출신 학교만 가려놓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그는 “논문 등에 찍혀 있는 학교 로고 워터마크를 통해 학교를 알 수 있는 경우도 많다”며 “학계가 워낙 좁아 블라인드 채용이 무의미하다”고 덧붙였다.

무늬만 블라인드…공정성 되레 ‘퇴보’

정부가 블라인드 채용 도입 명분으로 든 공정성도 되레 퇴보했다는 비판이 많다. 객관적인 평가 근거로 쓰이던 각종 경력을 확인할 수 없게 되면서 정성 평가가 개입할 여지가 커졌기 때문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딴 졸업생은 “국책연구기관에 지원했더니 기관 측에서 같은 학교연구자들에게 전화해 평판과 성실성 등을 묻는 ‘레퍼런스 체크’를 했다”고 전했다.

내정자를 정해 놓고 요식적 채용을 진행하는 관행도 일부 기관에서는 여전하다는 전언이다. 최근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C씨는 “우리 기관에서 일해달라”는 한 국책연구기관의 연락을 받고 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지원자 중 대부분은 C씨처럼 연락을 받은 이들이었다. 결국 최종 합격자는 다른 내정자였다. 그는 “서울교통공사가 친인척을 대거 채용한 것도 블라인드 채용을 거친 결과라는데, 차라리 내 스펙을 더 드러낼 수 있었다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부작용은 국책연구기관에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기 전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7년 조세재정연구원은 연구보고서에서 “취지는 좋지만 규모도 작고 인사 전문가도 부족한 국책연구원에 블라인드 채용 도입은 시기상조”라며 “오히려 채용청탁 등 부작용만 늘어날 가능성이 있어 기관 특성에 따라 적용을 달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블라인드 채용 자체에도 문제가 많지만 연구인력을 블라인드 채용으로 뽑는다는 건 정말이지 난센스”라며 “실제로는 학력을 비롯해 볼 것 다 본 뒤 뽑으면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