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부품·소재 강국의 조건

입력 2019-08-21 17:29
수정 2019-08-22 00:25
‘산업의 쌀’이 반도체라면 ‘로봇의 쌀’은 감속기다. 정밀감속기는 로봇이나 반도체 장비, LCD(액정표시장치) 장비 등 첨단장비 제조에 쓰인다. 고속 회전하는 모터를 기계 작동으로 연결하려면 회전수를 줄이고 힘을 증가시켜야 한다. 이 역할을 하는 게 감속기다.

그동안 일본 업체가 반세기 동안 장악해온 이 제품을 놓고 세계 수백 개 업체가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하지만 국내 중소기업이 이를 개발했다. SBB테크다. 10년 전 이를 개발했고 수년 전부터 양산에 들어갔다. 이 회사는 종업원 약 100명의 중소기업이다. 테헤란밸리나 판교처럼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곳에 있는 업체가 아니다. 경기 김포시 월곶면에 있다. 강화대교 부근의 외진 곳이어서 우수 인재 확보가 쉽지 않다.

우직하게 도전하는 정신 필요

이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창업자인 이부락 사장(67)의 우직함 덕분이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뒤 소재·부품 분야에 30년 넘게 매달려왔다. 소재 부품은 개발해도 누가 써준다는 보장이 없는 외로운 비즈니스다. 그런데도 서울 일원동 반지하 셋방에서 창업해 지금까지 매달려온 것은 제조업에서 소재·부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이다. 도레이나 교세라 등 일본의 주요 부품·소재 업체들은 탄소섬유나 세라믹 부품 등을 개발하는 데 보통 30년 이상 투자해왔다.

우직함과 더불어 부품 국산화를 위해 중요한 것은 공과대학과의 협력이다. 다행히도 이 사장은 산학협력을 통해 기술개발에 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상당수 중소기업은 대학과의 협력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대학은 ‘중소기업이 제공하는 연구비는 적고 요구사항은 많다’고 지적한다. 중소기업은 ‘대학이 논문 중심의 연구에만 매달릴 뿐 현장기술 개발엔 관심이 없다’고 푸념한다. 논문거리가 안 되면 연구 자체를 기피한다는 것이다. 대학에서는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 논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구조를 깨뜨리지 않으면 현장 중심의 산학협력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현장 중심으로 공대 혁신해야

일본과의 무역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공대의 혁신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산학협력의 효율을 높이고 국내 산업이 한 단계 도약하려면 공대 교육의 중심이 논문이 아니라 현장 기술개발에 맞춰져야 한다. 아헨공대를 비롯한 독일의 공과대는 산학협력을 통한 현장기술 개발을 중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학생을 평가한다. 독일이 기계 자동차 화학 등 각종 제조업과 부품·소재 분야에서 세계적인 강국이 된 것도 이런 실사구시 학풍에서 비롯됐다. 독일에서 기반기술을 배워온 일본은 지금도 독일을 스승으로 여긴다.

이를 구체화하려면 학생보다 먼저 교수들의 현장 경험이 중요하다. 교수가 변하지 않으면 교육 내용이 결코 변할 수 없다. 공과대 교수 중 일부를 기업체에서 연구개발 경험을 쌓은 사람들로 뽑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부품·소재 개발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 산업현장 전문가에게 교수 타이틀을 주는 방안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부품·소재 분야의 격차를 줄이려면 이런 비상대책이 필요하다.

산학협력을 통해 핵심 부품과 소재 장비 및 미래 먹거리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야 두 번 다시 산업의 급소를 공격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실패를 거울삼아 이를 극복할 방안을 찾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똑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는 게 역사가 가르쳐주는 준엄한 교훈이다.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