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헝클어진 공급망에도 '부가가치 한국' 경쟁력 있다

입력 2019-08-20 18:09
수정 2019-08-21 00:21
세계 각국의 ‘고부가가치’를 향한 경쟁이 치열하다. 무역 자체도 이미 부가가치 무역으로 탈바꿈한 상태다. 그만큼 공급망이 복잡해지고 기술과 지식이 중요해지는 세상이다. 그 속에서 한국 무역은 ‘세계 경제의 바로미터’로 인정받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에 완전히 노출돼 있고, 이미 높은 부가가치 제품을 수출하는 국가에 속한다. 하지만 좀 더 큰 부가가치를 올리기 위해 다른 나라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과 바이오 등 무궁무진한 분야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레이스다. 이 와중에 일본의 반도체 수출규제란 걸림돌이 생겼다. 한국 부가가치 수출의 현주소와 전망 등을 짚어본다.

지난달 발간된 일본 경제산업성의 통상백서는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국가들의 전자기기와 부품 수요를 한국에 빼앗길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일본의 장래 시장으로 여겼던 아세안에서 한국 등에 선수를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 이면에는 글로벌 가치사슬에 따른 고부가가치 품목의 수출이 자리 잡고 있다. 백서는 한국 제조업 생산에서 차지하는 수출품의 부가가치 비중이 2005년 19.2%, 2015년엔 22.4%나 된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16.1%(2015년)보다 훨씬 높다는 점을 내비치고 있다.

갈수록 무역에서 부가가치가 중요해지고 있다. 애플이 제조하는 스마트폰인 아이폰에서 중국의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1.8%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한국 기업을 포함한 수백 개 기업이 아이폰 제조에 참여하면서 부가가치를 창출해낸다. 물론 높은 부가가치는 지식집약과 자본집약의 산물이다. 자동차도 그렇고 반도체도 그렇다.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품목과 산업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에 세계 무역의 향방이 결정된다. 세계 기업들은 그런 방향에 맞춰 얽히고설켜 있다. 글로벌 가치사슬(GVC) 생태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각국의 무역 금액 외에 부가가치무역(TiVA) 통계를 따로 내고 있다.


반도체·정밀기계 부가가치화 주도

이런 부가가치 무역에서 한국의 위상은 높아지고 있다. 당장 세계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중국에서 그렇다. OECD 자료에 따르면 중국이 수출하는 제품에 들어가는 중간재의 연간 부가가치는 한국이 426억달러(2.2%)로 1위다. 일본의 346억달러에 비해 80억달러 많다. 반도체나 정밀기계 화학제품 등 각종 부품과 소재가 중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중국은 이들을 받아 완제품으로 만들어 미국과 유럽에 수출한다. 이런 제품들은 자본집약적이고 지식집약적이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고부가가치 무역은 어려운 과제였다. 오히려 일본에서 첨단소재와 부품을 들여와 수출 제품을 만들었다. 일본 닛세이기초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전자부품과 통신기기에서 차지하는 일본 부품의 부가가치는 1995년 기준 20%를 넘는 게 수두룩하다. 지금은 모든 품목의 일본 부가가치 평균이 5%에도 못 미친다. 자동차 부품은 이미 일본과 경합구도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전자 부품 또한 많이 줄어들고 있다. 그만큼 부품의 국산화가 이뤄졌거나 다른 국가 제품으로 방향을 틀었다.

물론 한국 부가가치 품목 수출에서 중국의 성장을 빼놓을 수 없다. ‘세계의 공장’ 중국은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제조 기업들을 불러들였다. 제품을 만들기 위한 각종 기자재, 부품, 원료 등을 가까운 한국에서 찾았다. 가격경쟁력이나 품질경쟁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디지털도 한몫했다. 한국에서 디지털 기기의 급속한 보급은 노동력 절감과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다. 원가 경쟁력이 충분히 생겼다. 도표에 따르면 부가가치를 높이는 산업용 로봇 활용 비중에서 한국이 월등하다. 독일조차 한국의 절반이다.

고부가가치화를 향한 선택과 집중 전략을 택하고 자급보다 글로벌화에 기울였던 기업 전략이 먹혀든 것이다. 국내 기업들은 전 세계 시장 개척에 나섰고 세계 1등 제품을 모색했다. 그렇게 해서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세계 1등 부품과 제품이 탄생했다.

외국에선 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사태에서 한국 기업들의 발 빠른 움직임을 눈여겨본다. 사드 사태가 터진 이후 한국 기업들은 기민하게 중국에 치우쳤던 생산 거점을 분산시켰다. 그만큼 한국 기업의 위기 대응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지금 세계 무역의 퇴조가 확연하다. 네덜란드의 세계무역국 자료에 따르면 지난 5월 세계 무역량은 전년 동기 대비 0.4% 줄어들었다. 독일과 일본도 감소했으며 한국 또한 줄었다. 한국의 7월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1% 감소했다. 한국의 부가가치 품목 수출도 떨어지고 있다.

자동차 부품은 일본과 경합

한국에서 반도체 수출이 감소하면 주변국도 타격을 받는다. 일본의 반도체 제조장치와 주변부품 수요가 줄어든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런 때 자력갱생을 외치고 중국 내 자급경제를 독촉하고 있다. 자칫 한국의 대중 수출에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위기일수록 기회가 마련된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한 전문가는 중국 시장에 대한 미국 기업의 경쟁력 저하가 한국 기업에 이득이 될 것이라고 본다.

산업통상자원부도 최근 내놓은 보고서에서 “미·중 무역분쟁 속에 중국의 부품·소재산업 자급률 향상이 한국에 위기이자 기회가 되고 있다”고 전제한다. 보고서는 이어 “중국은 한국의 대(對)중국 주력 수출제품인 철강, 석유화학에서 이미 자급 생산체제를 갖췄다고 평가되며, 이제는 반도체의 자급 준비도 착착 진행하고 있다”며 “그동안 중국에 중간재를 공급하던 한국, 일본, 대만과 중국 간의 분업 협력구조가 깨지면서 무한 경쟁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보고서는 중국의 부품 자급률이 높아질 때일수록 한국이 소재와 장비를 공급하는 망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조립·부품산업이 일본의 소재·장비를 공급받아 성장했듯이 우리도 중국에 대해 일본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일·중·대만 지역협력 깨질 듯

한·일 마찰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재료를 수출 규제한다면 가치사슬 체계는 달라지고 부가가치 시스템도 흔들린다. 이럴 때일수록 새로운 공급망을 만들거나 보다 나은 소재를 개발할 수도 있다. 이들 모두 기업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몫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미래를 향한 부가가치를 누가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산업부 보고서에도 “전기자동차, 스마트와 같은 신산업은 아직 권역별 가치사슬이 형성돼 있지 않다”며 “새롭게 형성되는 가치사슬을 우리가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최근 일본 정부와 재계 언론은 하나같이 ‘디지털’을 외치고 있다. 디지털 지체로 생긴 한국과의 부가가치 열위를 만회하겠다고 읽힌다. 새로운 가치사슬과 부가가치를 향해 애쓰는 노력이 엿보인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촉발된 부품 소재 국산화도 나름 의미 있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일본보다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5G 등 지식집약적인 4차 산업에 매진하는 것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