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경제 낙관론이 지속되고 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6일 현재 경제상황과 관련, “거시경제에서 굉장히 탄탄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1분기 마이너스 성장과 고용 악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경제의 큰 그림을 봐주면 좋겠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날 “대한민국의 경제력에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9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한국 경제가) 재정의 역할을 키울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지난 14일 중소기업인과의 대화에서 “총체적으로 우리 경제는 성공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한 발언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긍정적인 경제지표로 신규 벤처투자 역대 최대, 신설법인 수 10만 개 돌파, 저임금 근로자 비중 역대 최저 등을 부각했다. 고용안전망이 강화됐고,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돌파하며 “우리 경제의 외연도 넓어졌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다만 “삶의 질 개선을 체감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다”며 재정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 등을 수정하기보다 사회·복지 정책에 재정 투자를 계속 늘리겠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은 “저성장과 양극화, 일자리, 저출산·고령화 등 구조적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며 “지금 재정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가까운 미래에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 "신설법인 역대 최다"라면서…자영업 폐업률 88%는 언급 안해
“신규 벤처투자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고, 신설법인 수가 10만 개를 돌파했습니다. 혁신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최초로 세종시를 ‘국가재정전략회의’ 장소로 택한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당·정·청이 총출동한 자리에서 지난 2년에 대한 긍정적인 변화로 벤처 부문 성과를 가장 먼저 꼽았다.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와 함께 3대 정책 축으로 내건 ‘혁신성장’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성과로 이 같은 내용을 앞세운 셈이다.
논란 부추기는 지표 인용
‘역대 최대 벤처투자·신설법인 수’와 관련한 성과를 부각시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혁신’ ‘벤처’ ‘경제’ 등을 주제로 한 행사에서 대통령 발언에 등장하는 ‘단골 치적’으로 꼽힌다. 지난 1년 새 공식 석상에서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 강조한 횟수만 열 차례가 넘는다. ‘2018 대한민국 혁신성장 보고대회’를 시작으로 지난해 국회시정연설, 2019년 신년기자회견, 국무회의 및 수석보좌관회의까지 빠짐없이 나왔다. 일각에서 ‘성과 우려먹기’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문 대통령은 이날 재정 확대 필요성을 강조하며 “저임금 근로자 비중과 임금 5분위(상위 20% 평균 임금을 하위 20% 평균 임금으로 나눈 값) 배율이 역대 최저로 낮아졌고 상용직과 고용보험 가입자 수가 크게 늘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직장인들의 소득과 삶의 질이 분명히 개선됐다”고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이 사실이냐를 놓고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임금 5분위 배율이 자의적인 해석에 가깝다는 것이다. 5분위 배율이 역대 최저로 낮아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임금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이 통계에는 실직자와 무직자가 빠져 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여파로 일자리에서 밀려난 이들이 배제돼 있다는 의미다. 오히려 상위 20% 가구 소득을 하위 20% 가구 소득으로 나눈 균등화 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은 2017년 4분기 4.61배에서 1년 새 5.47배로 확대됐다. 2003년 이후 격차가 최악으로 벌어졌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직장인들 삶의 질이 나아졌다고 단언한 것 역시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 밖에 신설법인이 늘어난 것과 달리 자영업 폐업률이 87.9%에 달한다는 통계 등 뼈아픈 현실에 대해 시선을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의사가 환자에게 좋은 얘기만 하나”
성과 알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나쁜 지표를 외면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지난 15일 발표된 ‘19년 만에 가장 높은 실업률’이 대표적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실업률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지난 9일 취임 2주년을 맞아 KBS와 특집 생방송으로 진행한 대담에서 “지난 2, 3월 청년 고용률은 아주 높아졌고 청년 실업률은 아주 낮아졌다”고 밝힌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통계청의 4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청년 체감실업률은 25.2%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청년과 노인들의 초단기 일자리가 늘어난 대신 30~40대 정규 일자리는 오히려 감소하면서 그간 문재인 정부가 ‘고용의 질’을 강조해온 것이 무색해졌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물론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이 민간에서 제기되는 경제위기론을 무작정 수용할 수는 없다. 문 대통령도 이날 “경제는 심리”라고 하면서 위기론이 경제주체들의 자신감 상실로 확산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럼에도 경제 현실에 대한 문 대통령과 청와대 인식은 전문가들과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위기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며 “대통령께서 좋은 지표를 적극 발굴해 홍보하라고 지시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에 대해 “동행지수나 설비투자 등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지만 문재인 정부가 병적으로 이를 외면하고 있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핑크빛 전망은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 역시 “환자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의사는 좋은 의사라고 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윤 교수는 “환자를 안심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환자를 낫게 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처방을 내리는 게 중요하다”며 “헛된 기대만 키우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m